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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물결로 뜨겁던 2002년 6월...생생했던 공동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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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2022년 6월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작년 6월 기억은 벌써 가물가물할지 몰라도 2002년 6월에 무얼 하고 지냈는지는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군인이었다. 심지어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등병이었는데, 사단장이 병사들과 함께 축구를 보러 온다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이벤트 준비에 부대는 흡사 전투태세였다. 연병장의 돌멩이를 하릴없이 줍고 내무반 바닥을 치약으로 닦았으나 그래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듯 간부들은 병사들을 닦달했다. 이윽고 경기 시간이 되었고 사단장의 등장과 함께 우리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다다랐으나, 유상철과 황선홍의 연속골로 분위기는 급격하게 풀렸다. 잠깐이나마 계급장을 떼고 서로를 얼싸안은 채 환호했다. 사단장은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로 돌아갔고 내무반의 공기는 모처럼 (잠시) 산뜻했다.
이어진 조별리그 두 경기는 운 좋게도 첫 휴가 중에 볼 수 있었다. 모처럼의 자유도 좋았고 거리 응원은 말할 나위 없이 좋았으며, 첫 번째 휴가에만 맛볼 수 있는 지인들의 환대도 무척 좋았다. 국방부 시계가 돌아가듯 복귀 날짜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주는 슬픔과 고뇌는 피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축구는 즐겁고 뜨거웠다. 축구공 하나에 집중하면서 그것에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는 듯 목놓아 대한민국을 외쳤다. 같은 색 옷을 입고 같은 박자로 함께 손뼉을 쳤다. 그때 우린 조금 미쳤었다. 그런 여름이었다.
지금이 2022년 6월인데, 20년 전 일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날 일인가. 당연하다. 2002 한일 월드컵에 한해서는 그렇다. 비교적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그 기간에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고,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있던 날 오후와 밤은 어땠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모조리 기억할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외롭든 상관없이 2002년 6월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떤 세대에게 공동체의 기억으로 특별하게 각인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구에서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가 내가 사는 나라 곳곳에서 열렸고, 그 이벤트에서 우리나라가 넘보지 못했던 축구 강호들을 하나둘 차례로 꺾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우리는 열광했다. 함께 열광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은 더는 단순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맞이하여 ‘2022 KFA 풋볼 페스티벌’이 6월 1일부터 6일까지 엿새 동안 서울월드컵경기장 일대에서 열린다고 한다. 20년 전 국민 감독이 된 히딩크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날의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히딩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예전과 달리 다들 배 둘레가 많이 커졌더라. 보기 좋았다.” 20년은 누군가의 배 둘레가 증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대한축구협회(KFA)는 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행사를 준비했다. 경기장 북측 광장에서는 행사 내내 그날의 기억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며 보조경기장에서는 한국 축구의 미래인 유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이제는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축구의 현실에 발맞춘 축구 산업 특별전과 기술 축구를 위한 콘퍼런스도 열린다. 손흥민, 황의조 등 스타 선수들의 자선 경매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경기장 내 풋볼팬타지움에서는 20주년 특별전이 열리며 특히 고 유상철 감독 추모전은 6월 14일까지 계속된다.
뭐니 뭐니 해도 하이라이트는 축구 그 자체다. 올해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라 원래 이즈음은 한창 본선이 열릴 시기이지만 (그래서 20주년 행사를 하는 것이지만) 이번 월드컵 개최지인 카타르의 기후 특성상 최초의 겨울 월드컵이 확정됐다. 하여 이번 6월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A매치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일 브라질을 시작으로 칠레, 파라과이, 이집트를 차례로 만난다. 2002년 이후로 홈에서의 4연전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긴 소집 기간을 감안하면 이번 4연전이 월드컵을 앞둔 실전 모의고사인 셈이라 팬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월드컵 못지않은 붉은 물결이 상암동을 비롯한 대한민국 곳곳을 물들이는 6월이 될 것만 같다.
20년 전 영웅들이 적당히 배가 나온 중년 아저씨가 됐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다. 속담에 따르더라도 20년은 강산이 두 번은 변하는 시기이고, 바쁘디바쁜 현대사회에서 그 변화의 폭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지금도 월드컵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가 맞지만, 국가의 위상을 결정하는 중대사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선수들은 ‘축구팬’을 위해 그리고 축구 선수로서의 성공을 위해 경기에 나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피치에 몸을 던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기면 칭송받고, 좋지 않은 플레이를 하면 별의별 비판과 비난을 받겠지만 무작정 '매국노'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대표의 축구, 월드컵 축구 또한 축구의 일부일 뿐이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위대한 그 무엇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태릉선수촌을 상징으로 하는 엘리트 스포츠는 지금껏 그 위대한 역할을 여러 방식으로 맡아왔다. 올림픽 성적이 국위 선양이 되고, 시상대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것이 애국이 되었다. 국가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압박이 국가대표에 가해졌다. 축구에는 거기에 더한 페이소스(연민)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세계를 주름잡는 축구 강호들. 거기에 도전하는 작은 나라 한국…… 전후 열악한 환경에서 처음으로 나간 1954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역사에 남을 스코어로 패배한다(헝가리전 9:0, 터키전 7:0). 그때부터 축구는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신력의 스포츠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첫 승을 하기까지도 많은 패배와 더 많은 좌절이 필요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야 대한민국 축구는 월드컵에서 이겼고, 내친김에 기적과 같은 4강까지 올랐다.
당시 국가대표는 월드컵 성적을 위해 다시는 시도할 수 없는 기나긴 소집 훈련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국 리그는 월드컵 성적이라는 대의 앞에 자연스레 희생되었다.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받았을 선수들의 압박감은 미루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필 불편한 이웃 일본과의 공동 개최이기에 성적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대회가 다가올수록 팀의 일거수일투족은 스포츠뉴스가 아닌 일반 뉴스의 첫머리에 놓였다. 다행히 그들은 압박을 이겨냈고 한여름의 꿈을 모두에게 선사했다. ‘국민’과 ‘국가’가 그들 덕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다시 6월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건 꽤 징그러운 일이다. 과도한 동일성은 폭력으로 변하기 매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첨예한 갈등은 끝없이 이어지고 정치는 이를 봉합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징그럽게도) 동일한 자세와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가끔은 마음을 놓고 같은 색깔 옷을 입은 채 같은 박자로 손뼉 치는 시간도 괜찮겠다 싶다. 축구는 그걸 가능하게 한다. 2002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2022년의 축구는 2002년의 축구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월드컵은 다른 나라에서 열리고, 그 시절처럼 선수를 데려다 훈련시킬 여건도 되지 않는다. 20년 사이, 대한민국은 축구에 있어 어느 정도 보통 국가가 되었다. 유럽에 많은 선수가 진출했고 그중 득점왕까지 배출했다. 자국 리그에 승강제를 도입했고, 대륙별 클럽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2002년의 유산으로, 한 세대를 지나온 지금에 와서야 진짜 승부를 가릴 때가 온 것도 같다. 그해 6월은 아름다웠다. 올해 6월은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겨울은 어떨까? 바야흐로 축구의 계절이 오고 있다. 일단 당장은 조금 즐겨도 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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