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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때문에 우울해"라는 말이 더 이상 유별나지 않은 이유 [마음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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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2018년 기록적 폭염, 2019년 관측 사상 가장 따뜻했던 겨울, 2020년 54일간의 장마.
이상기후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후와 관련된 심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봄 탄다', '가을 탄다'라는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태불안(eco anxiety), '기후슬픔(climate grief)', '기후우울(climate depression)' 등의 용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20대 직장인 엄지혜씨는 코로나19 사태 발발 첫해인 2020년 여름 낯선 느낌을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에너지가 넘쳐야 할 여름인데 어색하리만큼 기운이 없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날씨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해 여름은 이상하게 매일 비소식이 들렸다. 실제로 그해 54일 동안 이어진 장마는 역대 최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앞선 기록은 2013년의 49일이었다.
엄씨는 "이전에만 해도 '지구 망하는 건 우리 죽은 뒤일 테니 알 바 아냐'라는 농담을 하곤 했지만, 2020년부터 '이러다가 정말 지구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기후위기가 지금 당장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는 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이는 엄씨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2019년 미국심리학회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68%의 미국 성인이 이상기후와 관련해 불안을 느꼈고, 만 18~34세의 성인 중 47%가 기후불안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12월 영국의 의학전문지 '랜싯'에 게재된 보고서에 따르면, 만 16~25세의 청년 1만 명 중 75%가 "미래가 두렵다"고 답했고, 56%는 "인류는 망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무력하게 다가오는 기후위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행히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워크숍 등이 진행되고 있다.
녹색연합은 지난해 5월부터 5주 동안 화상회의를 통한 '재연결 작업'을 진행했다. 재연결 작업은 미국의 생태철학자인 조애나 메이시가 고안한 작업으로, '나와 세상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전환에 참여하는 것이다. 50여 년 동안 재연결 작업 워크숍을 진행한 메이시는 '연결성'에 초점을 뒀다.
재연결 작업은 나선형 순환 구조를 갖는다. '고마움으로 시작하기'→ '세상에 대한 고통 존중하기'→ '새로운 눈으로 보기'→ '앞으로 나아가기'의 과정이다. 도중에 언제든 다시 1단계로 돌아갈 수 있다.
당시 워크숍 안내를 맡았던 이다예 녹색연합 기후행동팀 활동가는 지난달 30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첫 회차인 '고마움' 단계에서 참여자들은 열린 문장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이는 비극을 마주해 두렵고 힘들 때, 마음의 중심을 잡는 첫 단계"라고 말했다.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채웠다.
"최근에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_____ 입니다."
"어렸을 때 즐거움을 느꼈던 장소는 ______ 입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______ 입니다."
두 번째 테마인 '세상에 대한 고통 존중' 단계에서 참여자들은 '애도의 돌무덤' 의식을 가졌다.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는 소중한 무언가를 떠올리고, 애도를 표하는 시간이다. 이후 호흡 명상 시간에서 참여자들은 정혜선 기후활동가의 안내에 따라 '들숨에 슬픔을 마시고 날숨에 사랑을 내쉬는' 상상을 했다.
마지막 회차에서는 앞으로 일상에서 대전환에 참여할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나 자신의 돌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지구를 위해, 혹은 모든 생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 적는 작업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언제든 무력감과 괴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 메이시는 "그럴 때 다시 1단계인 고마움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조언한다.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경우도 있다. 여성환경연대는 4월부터 '기후우울을 마주하는 글쓰기 워크숍'을 열고 있다. 진행은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를 쓴 하리타 작가가 맡았다. 하 작가는 '모두를위한환경교육연구소' 비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 작가는 지난달 31일 한국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원래 우울증으로 고생하면서 약물과 심리치료를 받았고, 대학원에서 환경사회학을 전공했기에 기후우울이라는 주제에 쉽게 공감했다"며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해 의기투합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 또한 기후우울을 겪는 당사자다. 독일에 거주하는 그는 "올해 초 환경 관련 책을 번역하던 중 유기농 토마토 재배에 많은 플라스틱 비닐과 지하수가 쓰이고, 또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 환경 등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며 "그러면서 나는 결국 농직거래 채소를 '비싸다'고 불평하는 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환경 전공자로서 이런 것도 몰랐고, 외면했다는 생각에 자책감과 낭패감, 나아가 '나름대로 애썼는데 다 소용없다'는 무력감도 들었다"며 "먹거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식욕도 잃었다"고 덧붙였다.
이 워크숍은 글쓰기 기술보다 상호 돌봄과 치유에 초점을 둔다. 하 작가는 "수필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필연적으로 자기 성찰과 치유의 기능이 있다"며 "자기 삶의 기억과 경험을 돌아보고 감정을 추스리며 언어로 표현하는 일 자체가 자가 돌봄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1주차에서는 기후우울로 인한 감각과 증상을 돌아보고 원인이 된 사건, 사람 등에 대해 나눴다. 2주차에서는 기후우울의 기저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하 작가는 "이 과정에서 아픈 감정에만 몰두하기보다는 우리가 기후우울을 겪는 만큼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실을 상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3주차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지구의 것들', '꼭 나와 같은 존재'들을 소개하며 자연과 더 연결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봤다. 마지막 4주차에서는 기후위기의 여정은 장거리 레이스인 만큼 각자가 해낸 일들을 기념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나눴다.
한 참가자는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정적이고 힘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목소리를 내는 강한 활동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글을) 쓰기 전에는 없던 목소리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같다."
기후우울 글쓰기 워크숍 참가자의 소감
2019년 6월 출범한 생태적지혜연구소도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소는 4월 4일부터 10회의 강의를 통해 '생태슬픔과 전환'을 다뤘다. 14년차 상담사 이미진씨는 지난달 23일 '생태슬픔 방어기제에서 전환으로'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이씨는 "생태심리학계에서 환경 문제는 사실상 마음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며 "자연과의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자연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결국 친환경적이지 않은 행동을 만들어냈고, 이는 기후위기와 기후우울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결국 생태 문제는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얘기다.
그는 "생태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연결될 거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연뿐만 아니라 소수자, 노동, 전쟁 등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려는 자세도 생태적 태도"라고 덧붙였다.
심리학계에 따르면 우울증은 대개 '정서적 고립감'에서 악화된다. 기후우울도 마찬가지다. 엄지혜씨도 "친구들은 괜찮은데 나만 이렇게 예민한가라는 생각에 더욱 힘이 빠졌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연결성에 집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많은 이가 '생태슬픔', '기후우울'이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자신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언어화 및 가시화됐다는 느낌에 위로와 공감을 받게 됐다"고 진단했다.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가 플로깅, 용기(容器)내 챌린지 등을 통해 생태불안을 이겨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친환경적 활동을 통해 자연과 주변과의 연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결과가 아닌 과정에 초점을 두면서 주체감도 느끼기 때문이다. 엄씨도 "불필요한 소비 줄이기, 육식 최소화하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니 무력감이 많이 해소됐다"고 얘기했다.
1단계: 부정
2단계: 분노
3단계: 협상
4단계: 우울
5단계: 수용
출처: 미국 몬태나대 스티브 러닝 생태학 교수
출처: 캐나다 캘거리대 환경지속가능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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