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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워커’로 삽니다, 쉬지 않고 벌인 ‘딴짓’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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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잼 원정대>는 '현대인의 일'을 탐구하는 콘텐츠 실험실 '커리업(caree-up)'의 인터뷰 브랜드입니다. '일에서의 재미'라는 희소자원을 찾아 정박하지 않고, 원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동력 삼아 일하는 방법'을 수집합니다.
여기, 매일 다른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명동, 내일은 판교, 모레는 여의도, 글피는 홍대. 단촐한 배낭에 노트북 하나 넣고서 가벼운 두 발로 일주일 내내 서울의 동서남북을 누비죠. 카카오엔터프라이즈, LG경영연구원, MKYU, 스타트업 프립, 페이지명동 등 지난 1년간 그가 잠깐씩 거쳐간 일터만 줄 세워도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요. 요즘 산업계의 트렌드인 ‘커뮤니티 비즈니스’ 청사진을 그리는 게 그의 일. 계약서는 심플합니다. 1년 단위, 주 1회 출근, 직무는 ‘커뮤니티 디렉터’.
이 사람의 이름은 백영선(46). ‘영화롭고 선하게 살라’는 뜻의 본명보다, ‘산과 바다를 닮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직접 만든 부캐 ‘록담’이란 예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죠. 카카오 프로젝트100의 기획자이자, 1,500여 명이 다녀간 커뮤니티 ‘낯선 대학’과 경험공유살롱 ‘리뷰빙자리뷰’의 운영자인 록담씨는 현재 자신을 ‘소속 없이 독자적으로 일하는 프리워커(Free worker)’라고 정의합니다.
지난 2019년, 그는 9년 동안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정규직을 포기하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만 출근하는 주3일 계약관계를 맺었습니다. 연봉과 복지를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은 다름 아닌 ‘겸직할 자유’. 대기업 대 개인으로서는 전무후무했던 바로 그 계약서를 레퍼런스 삼아,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 번에 여러 회사에서 일하는 ‘문어발 출근’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한때 록담씨는 ‘끗발 날리는’ 문화마케팅 전문가였어요. 공연기획사에서 클래식, 재즈, 발레부터 마술쇼까지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공연을 마케팅했습니다. 2010년 포털 다음(Daum)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직하며 울트라뮤직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 등 내로라하는 축제의 현장들을 안방처럼 누볐습니다. 훨훨 나는 전성기였죠. 사원 1,000명 중 단 2명에게만 주는 우수사원상까지 받을 정도로요. 그러나 비상의 시간은 짜릿했던 만큼 찰나였습니다. 2012년 SNS 마케팅의 시대가 오며, 문화마케팅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겁니다.
미친 속도로 세상이 변하는 가운데, 회사는 합병되고 조직은 쉼 없이 개편됐죠. 8년간 쌓은 커리어는 유통기한이 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분야만 깊게 팠던 만큼, 시야는 좁았고 솟아날 구멍은 아득했어요. 고립되는 건 순식간이었죠. ‘알아서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이곳저곳을 방황하듯 전전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출근길 새까만 지하철 창문에 비친 퀭한 얼굴을 보며 물었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변화의 파고가 높았던 만큼 표류도 길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사표를 던지고 새로 시작하기에, 자신은 이미 젊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두 아들은 아직 어렸죠.
록담씨는 그 답을 회사 안이 아닌, 밖에서 찾기로 합니다. ‘나만 이런 거 아니지?’ 자신처럼 회사 생활의 지겨움에 지친 사람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거죠. 7명이 50명이 되고, 50명이 100명이 되더니 곧 500명을 훌쩍 넘더군요. 고민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움에 목말라 있던 30~40대 직업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스타트업 대표·마케터·자영업자·작가와 시인·기자와 PD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모이니,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불꽃이 튀고 큰 불이 활활 붙으며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느슨하게 연결된 이들끼리 서로의 시야를 넓히며 ‘상호 성장’하기 시작한 거죠. ‘판’을 쉬지 않고 깔다 보니 1,5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커뮤니티 만드는 데에도 ‘나름의 전문성’이 생긴 거죠. 사부작 사부작 회사 밖에 벌인 이 ‘딴짓’은 그렇게 록담씨에게 ‘독립할 용기’를 심어줬습니다. 큰길의 현기증 나는 속도전을 견디다 못해 들어선 샛길에서 ‘솟아날 구멍’을 보게 된 셈입니다.
프리워커로 일하는 동안, ‘일의 기본값’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부대끼며 일하는 동료들이 사라진 대신,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기간제로 협업하는 파트너들이 생겼고요. 단번에 나를 설명해 주던 대기업 명함이 사라진 대신, ‘시키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죠. 판교 한복판에 마련된 번듯한 내 자리는 없지만, 가벼운 백팩 하나 메고 어디로든 다닐 수 있는 홀가분함이 생겼습니다.
전에 없던 형태로, 전에 없던 ‘업(業)’의 레퍼런스를 만들어 가고 있는 플라잉웨일(Flying Whale)의 대표 록담 백영선씨를 서울과 판교에서 두 차례에 걸쳐 만났습니다. (백영선씨의 요청으로, 이하 닉네임인 ‘록담’으로 칭합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내 머릿속엔 ‘딴짓’할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 판 벌리는 걸 좋아했어. 고등학생 땐, 주말마다 가던 성당에서 애들 모아 축제를 만들었거든. 대학 가서도 그 버릇 어디 가겠어. 노래 한 소절 제대로 못 부르는 주제에 민중가요 구성지게 뽑아내던 선배들 모습에 반해 노래패에 들어갔지. ‘뭐든 하겠다’고 들어온 애를 내쫓지는 못하고, 선배들은 공연 사회 마이크를 맡겼어. 어랏? 제법 소질이 있는 거야. 다들 내가 마이크만 잡으면 송해가 된대.
급기야 맨손으로 거리축제 만들기에 나섰지. 학교 앞 도로를 막고 스테이지를 세웠더니 학생들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까지 막 쏟아져 나왔어.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게 딱 그거였거든. 캠퍼스의 경계가 사라지는 마을 축제. 머릿속에서만 그려봤던 그림이 눈앞에 뜨겁게 펼쳐지는 모습을 보니 짜릿하더라. 취업할 때쯤이 되니 아는 선배가 물었어. 소리꾼 임진택 선생이 이끄는 축제 사무국에서 사람을 뽑는다는데 관심 있냐고. 옳다구나, 그 길로 축제판에 나를 던졌지. 회사 들어갈 생각은 접은 지 이미 오래였어. ‘평생 축제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싶었거든.
판 깔고, 사람 모으는 데엔 아무래도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외향인 중에서 제일 가는 ’끝판왕’ 외향인다운 씩씩한 추진력으로 그는 축제판에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그의 수완을 눈여겨본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가 ‘세계적인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쇼를 마케팅해 달라’고 제안하죠. 영세한 회사 사정상,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이 넉넉지 않았던 상황. 그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당시(2004년)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공개 야구 시구’에 카퍼필드를 세우기로 한 겁니다. 결과는 대성공. 시구를 선보이는 카퍼필드의 모습이 다음 날 스포츠 신문 1면을 일제히 장식하고, 공중파 뉴스까지 타게 된 거죠. 티켓 예매율이 수직 상승했습니다. 성취감의 레버가 한 번 당겨지자 그다음부턴 멈출 수 없었죠. 눈 뜨는 순간부터 잠 드는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일에 쏟기 시작합니다.
63빌딩 아트홀의 공연을 기획하는 업무를 거쳐 그는 2010년, 포털 다음(Daum)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직합니다. 문화 마케팅이 한창 각광받던 시절이었죠. 영화제나 페스티벌의 메인 스폰서 자리를 따내, 관객들에게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체력도 팔팔한데 관록까지 붙었겠다, 일을 ‘파죽지세’로 해 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나이 30대 중반이었죠. 울트라뮤직페스티벌, 인천펜타포트페스티벌 같은 음악축제부터 부산, 전주, 부천에서 열리던 국제영화제까지 전국을 누볐습니다. 경쟁사를 거뜬히 따돌릴 정도로 거침이 없었죠.
“해마다 페스티벌 스폰서들은 브랜드 이름이 찍힌 부채 굿즈를 만들었어요. 입구에서 아무리 열심히 나눠줘도 100m도 못 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고민이었죠. 정신 없이 방방 뛰려면 두 팔이 자유로워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했어요. 부채에 목걸이줄을 달아보면 어떨까? 나눠줄 때부터 사람들 목에 걸어줬어요. 그랬더니 처음엔 자기 목에 부채가 걸려 있는 줄도 모르다가, 햇빛이 쏟아지거나 땀이 흐르면 ‘어? 이게 있었네’ 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죠. 해마다 겪는 ‘부채 잔혹사’에서 처음으로 살아남은 거예요. 각종 방송 영상에 수만 명이 ‘다음’ 찍힌 부채를 들고 뛰는 장면이 비춰지는 데 얼마나 짜릿했겠어요.”
훨훨 날았던 그해 1,000명 사원 중 딱 두 명에게만 주는 우수 사원상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런 날들이 쭉 이어질 줄로만 알았습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에 가슴이 기분 좋게 울렁거리던 날들이요. 하지만 그땐 전혀 알지 못했죠. 출근길에 휘파람이 절로 나오던 그 날들이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란 사실을요.
2012년은 SNS의 시대였어. 너도나도 페이스북을 쓰기 시작했지. 회사의 기류도 심상치 않았어. 이젠 문화마케팅이 아니라 SNS 마케팅의 시대라는 거야. 영화제, 페스티벌 스폰서 예산은 대폭 줄었어. 알아서 배워서 살길을 찾으라는 통보가 내려왔지. 난 공연예술계 경력만 8년이었거든? 나름 다부지게 쌓아왔다 자신했던 내 모든 전문성이 한순간에 쓸모가 없어진 거야.
첫째가 아직 한참 어릴 때였어.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했지. 누구나 태세 전환에 빠른 건 아니잖아. 생전 해본 적 없는 일들을 더듬더듬 배우면서, 내 자신이 자꾸 초라해졌어. 어린 친구들의 번뜩이는 센스를 따라가기 힘들더라. 일에선 먹어본 적 없던 욕을 먹고, ‘능력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지. 억울했어. 1년 전만 해도, 나는 ‘못해낼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불과 1년 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는 게.
그때 알았지. 전문성을 뒤집으면 폐쇄성이구나.
전성기는 짧았고, 추락은 길었어.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쳐지고 (2014년 10월, 다음 커뮤니케이션은 카카오와 합병했다) 몸담고 있던 팀이 분해되거나 해체되길 반복했어. 4년 동안 긴 방황이 이어졌지. 사내에서 팀 단위로 사람을 뽑는데, 대부분 개발자나 기획자만 받는 거야. 스타트업 출신 동료들은 너무 어렸고, 마흔을 내다보는 나는 밀릴 수밖에 없었지. 낭패감의 연속이었어. 시대는 나를 뒤에 남겨놓고 자꾸 앞질러 가기만 하더라. 한참을 부유했어.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4년 동안 그는 이런 저런 관리 업무를 전전했습니다. 전문분야였던 ‘문화예술’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들이었죠. 물론 안 맞는 일에서도 배우는 게 있다지만, 마흔 가까운 나이에 그저 꾹 참고 버티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시간이었죠.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어디서든 많이 찾는 직무에, 능력 빵빵한 사람들이야 쉽게 이직하고 몸값을 올리겠지만, 모두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회사 안에선 답이 안 보이니, 밖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보자. 그렇게 저랑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 거죠.”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 역시 각자의 직장에서 표류하며 막막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친구 7명이 모였고, 그 7명이 또 다른 7명씩을 초대해 49명을 모았습니다. 2016년 1월 출발한 이 커뮤니티의 이름은 ‘낯선 대학’. 건너 건너 알고만 지내는 ‘낯선’ 사람들을 모아, 매주 각자의 일에 대해 말하고 배우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취지였죠. 자신의 분야에서 최소 10년 넘게 일해온 33~45세 직업인이 매주 월요일마다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나눴습니다. 록담씨 같은 직장인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술집이나 서점을 운영하는 젊은 사장님부터, 스타트업 대표, 기자 PD, 마케터, 기획자, 개발자, 피아니스트, 시인까지 다양한 세계관 속 다양한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였죠.
어쩌면 모두가 ‘주변의 비슷함’에 질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사회인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주변을 돌아보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직장에 들어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죠. 회사 바깥의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서로의 존재가 워낙 생소하니,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모험이었어요. 낯선 사람으로부터 받는 새로운 자극은, 군데군데 쳐지고 늘어진 일상에 팽팽한 활기를 부여했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기소개만 하려 해도 척추에 힘이 ‘빡’ 들어가고 가슴이 뛰잖아요? 그 유쾌한 긴장감이 비슷함의 지겨움을 해소할 ‘돌파구’가 되어 준 겁니다.
록담씨는 ‘낯선 대학’의 성공 경험을 발판 삼아 더 열성적으로 판을 깔기 시작합니다. 일터가 아니라 놀이터이자 배움터가 될 수 있는 공간, 누구나 안전하게 환대받을 수 있는 ‘회사 밖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색적인 경험을 소개하는 소규모 경험 공유 살롱을 열었어요. ‘내 경험을 리뷰한다’는 뜻에서, ‘리뷰빙자리뷰(이하 리빙리)’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였고요. 재밌는 걸 피드에 자주 올리는 SNS 친구들을 데려다 무대에 세웠죠. 리뷰어는 매회 달라졌어요. 매년 사비를 털어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는 명상 콘퍼런스에 참여하는 친구,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덴마크의 자유학교에 입학한 친구, 벨기에에서 열리는 뮤직페스티벌에 매년 빠지지 않고 출석한 친구까지… 사람 자체가 콘텐츠인 거예요. 배울 게 너무 많았죠.”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대개 자신의 삶에서 큰길이 아닌, 골목을 개척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안식 휴가를 받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한 사람부터, 양말 수백만 원어치를 동네 곳곳에 전단지처럼 붙이고 다니는 사람까지… 멋지게 제멋대로 사는 이단아들이 자신의 경험을 ‘리빙리’를 통해 나눴어요. ‘다들 비슷하게 살다 비슷하게 늙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삶에 다양한 레퍼런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매회 신청자를 20명 내외로 받으니, ‘다음 번엔 나도 껴달라’며 아우성이었습니다. 뭔가에 한 번 꽂히면 뭐든 아끼지 않는 괴짜, 덕후, 마니아들의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을 끌어당겼죠. 3년 동안 58번 열렸던 '리빙리'에는 무려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커뮤니티는 나를 확장하는 힘이구나. 이때 알았어요. 일 바깥에서의 내가 살아나니, 자연스럽게 ‘일하는 나’ 역시 깨어나기 시작했고요.”
회사 밖에서 ‘딴짓’하는 거, 회사에 눈치 보이진 않았냐고? 의외로 그렇진 않았어. 오히려 딴짓이 본업의 영감이 되기도 했거든. 마침 회사에서 ‘스토리펀딩’ 사업을 담당하던 때였어.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을 펀딩 기획자로 섭외했지. 시인과 작가들은 ‘글쓰기 프로그램’을 열었고, 전문 성우는 ‘보이스 코칭 강좌’를, 뮤지컬 배우팀은 팬미팅을 열었어.
회사 밖에서 만든 네트워크를 이용해, 본업에서 멋진 퍼포먼스를 만든 거지. 섭외부터 기획, 완결까지 전처럼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 수 있는 일을 하니까 다시 신이 나더라. 매일 시들어가는 동태눈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기억 안 날 정도로.
또 판을 벌였지. 습관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내 동료들을 모아 ‘100일 프로젝트’를 시작했어. 글쓰기, 물 마시기, 필사하기 등 매일 해야 할 미션을 정해놓고 100일 동안 서로에게 미션 완수를 ‘인증’하는 거였지. 실행보증금 명목으로 10만원을 받았어. 무사히 끝내면 돌려주되, 하루 빠트릴 때마다 벌금으로 차감한 돈을 모아서 기부했고. 나중엔 미션에 성공한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보증금을 기부하더라. 꾸준히 해낸 김에 기분 좋게 쓰고 싶다면서.
사내 사회공헌 재단인 ‘카카오임팩트’가 이 모델을 눈여겨본 거야. ‘공식 론칭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이 왔지. ‘카카오프로젝트100’은 이렇게 탄생했어. 사내 동료 50명이서 작게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가 전 국민이 이용하는 공식 서비스가 된 거야.
좋은 아이디어는 절대 책상머리 앞에서 나오지 않는단 이야기가 있죠? 샤워할 때나 산책할 때, 친구들과 수다 떨 때, 예상치도 못하게 불쑥불쑥 찾아온다고요. 묶여있거나 고여 있는 상태에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없으니, 일상에 바람이 잘 들도록 ‘환기’를 해야 한단 거죠. 록담씨에겐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곧 ‘환기’였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 소통하는 게 곧 영감의 원천이 됐죠.
“다양한 일의 형태를 놓고 고민하던 중, ‘주3일 근무를 해보자’는 합의에 이르렀어요. 그때도 여전히 회사 밖에서 여러 일들을 해오고 있었거든요. 정규직, 연봉, 보너스 다 포기해야 했지만, 다시 없을 기회다 싶었죠. ‘겸직’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렇게 이런저런 시도를 벌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이젠 퇴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뮤니티를 하며 깨달은 게 있었거든요. ‘삶에는 다양한 때깔이 필요하다.’ 이젠 회사를 벗어나 자유로워져 볼 차례였습니다.
“나가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건 아니었어요. 회사를 그만두는 건 여전히 두려웠죠.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애초에 나란 사람이 ‘정규직 회사원’이라는 근무형태에 썩 잘 맞지 않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직접 만들어봐야겠다 싶었던 거예요. 내 몸에 딱 맞는 내 일의 형태를요. 회사를 나와보니, 퍼붓는 비도 모두 제 손바닥으로 막아야 하더군요. 빗물은 차가웠지만, 후회스럽기보단 후련했어요.”
5년간의 커뮤니티 운영 경험을 살려 그는 여러 회사에서 ‘커뮤니티 디렉터’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팬덤 비즈니스’가 급부상하며, 팬이나 구독자를 연결시키는 ‘커뮤니티’의 필요성도 주목받아왔죠. 사람들을 찾아 연결하고, 이들이 꾸준히 결속될 수 있도록 판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전 직장에서 했던 ‘주3일 근무’ 모델은 어딜 가서든 들이밀 수 있는 좋은 사례로 남았습니다. ‘함께 일해보자’ 제안해오는 회사들에게 모두 ‘주1일 근무’ 계약서를 내밀었어요. 아이디어를 제안하되, 실행은 그들이 직접 하게 했죠.
“행성의 주변을 도는 위성 같은 개념이에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채 일하는 거죠.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아서 더 객관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게요.”
코로나19가 강타한 지난 2년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기도 했습니다. '100일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온라인에 응용한 겁니다.
현재 록담씨가 카카오엔터프라이즈와 함께 만들고 있는 '데이즈(DAYS) 프로젝트'는 '100일 프로젝트'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직장 내 온라인 소셜라이징 프로그램'입니다. 코로나19 이후 극심한 관계 단절을 겪고 있는 사내 구성원들 사이에 '연대감'을 복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죠. 요즘 신입들은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재택 근무를 하니, 다른 직원들과 협업하고 소통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거든요.
"매일 글쓰기, 운동하기 챌린지를 해요. 사내 협업툴에 그걸 인증하고 서로 응원댓글을 달며 독려하죠. 일명 '랜선'으로 느슨한 연결을 도모하는 겁니다. 조직 내에 ‘보습 효과'를 만드는 개념이랄까요? 너무 질척거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지 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거예요."
올해로 록담씨는 ‘프리워커(free-worker)’로서 일한 지 3년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디어에서 낭만적으로 그리는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코로나19가 닥친 첫해는 그 직격탄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어요.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 한숨이 나오는 날들도 많았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주말, 밤낮, 새벽, 휴가 없이 일하기도 했어요. 하루는 드라마에서 회식하는 장면이 나오자 순간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무실에서 복작복작 부대끼며 일하던 동료들이 사라지니, 사무치게 외로웠던 거죠. 회사 다닐 때만 해도 너무 가까워 부담스럽기만 했던 관계들이, 막상 사라지고 보니 얼마나 아쉽던지요.
그래서 회사를 나온 것을 후회하냐 물으면 대답은 ‘노(NO)’라고 합니다. ‘프리워커’로서의 삶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느냐 물어도 역시 대답은 ‘NO’래요.
“저는 프리워커가 이상적인 일의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의 대안이라고 보지도 않고요. 그저 회사가 힘든 저 같은 사람에게 ‘적합한 일의 형태’인 거죠. 조직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런 분들은 굳이 나와서 비바람 맞을 이유가 없어요. 다만, 예전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선택지가 하나 생긴 것일 뿐이에요. 자신의 일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싶은 사람들이 눈치보지 않고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요.”
어쩌면, 절대적으로 무능하거나 유능한 사람을 나누는 기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학창 시절만 떠올려봐도 그래요. 영어 시간과 음악 시간, 체육 시간의 ‘1등’이 다 다르잖아요. 한쪽에선 훨훨 날던 사람이, 다른 쪽에선 설설 기기도 하죠. 록담씨는 말합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 충분히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어떤 사람에겐 회사의 안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회사의 밖일 수도 있겠죠. 맞고 틀리는 답 같은 건 없습니다. 각자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 자신에게 쉬지 않고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어떤 세계관에 최적화된 캐릭터인지’를요.
축제 만드는 일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네트워커’로 일하고 있는 록담씨. 오늘도 그는 부지런히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라네요.
“커뮤니티로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저는 360도의 시야를 갖게 됐어요. 자기 눈으로 정확히 볼 수 있는 시야각은 90도가 전부거든요? 옆통수, 뒤통수엔 눈이 안 달렸으니까. 나를 계속 봐주는 주변인들의 눈을 통하면 바로 등 뒤에 놓고도 못 보던 것들을 볼 수 있어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옆도 뒤도 제대로 살피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요.”
앞만 보고 달렸던 30대, 10년을 우직하게 팠던 외길이 끊기며 그는 오래 방황했습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벌이며 달라졌죠.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근육을 만들게 된 겁니다. 전문성의 유통기한이 점점 짧아지는 시대, 그가 내세우는 삶의 모토는 ‘몰빵하지 말자’입니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선 여러 개의 기둥이 필요한 거 같아요. 10년 전 저의 기둥은 ‘문화마케팅’이라는 외길 커리어, 딱 하나뿐이었던 거죠. 지금은 절대 외길을 걷지 않아요. 자꾸 골목을 만들죠. 부지런히 새 길을 파고, 그 길을 넓혀 나가다 보면 내 삶을 지탱해줄 또 하나의 기둥이 생기니까. 게다가 인생에 골목이 많으면 일상의 풍경이 재미있거든요. 배우는 것도 많고요.”
독립 3년 차,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일은 정상궤도에 올라 있지 않다고 해요.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받던 날들에 비하면, 수입 역시 들쭉날쭉하고요. 그러나 마음만큼은 마냥 불안하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은 '여러 기둥'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니까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일의 재미’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흔들리며 ‘내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해왔어요. 직장생활을 20년 해보니, 고정불변하게 정해진 ‘내 일’ 같은 건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단 생각이 들어요. 혈기 가득했던 20대 시절엔 축제에 미쳐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잖아요? 지금,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 계속 배우고 찾는 것, 이 과정 자체가 재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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