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 때마다 외치는 규제개혁

입력
2022.05.31 19:00
25면

편집자주

판결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판결이 쌓여 역사가 만들어진다. 판결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주목해야 할 판결들과 그 깊은 의미를 살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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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조례'는 독서실의 열람실 시설기준으로 "남녀별로 좌석이 구분되도록 배열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조례는 독서실 내에서 이성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차단하여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고 성범죄를 예방할 목적으로 제정됐다. 만약 독서실 운영자가 남녀 혼석 금지에 관한 사항을 1차 위반할 때는 10일 이상의 교습정지처분, 2차 위반 때는 등록말소를 하게 하였다.

원고는 2017년 10월부터 전주시에서 학습장소로 제공되는 독서실을 운영하였다. 원고는 전주교육청에 독서실 등록을 하면서 남녀별로 좌석이 구분 배열된 열람실 배치도를 제출했다. 그런데 전주교육청은 두어 달 후쯤에 독서실에 대한 현장점검을 실시하여 열람실의 남녀별 좌석 구분 배열이 준수되지 않았고, 배치도상 남성 좌석으로 지정된 곳을 여성이 이용하고, 여성 좌석으로 지정된 곳을 남성이 이용하여 남녀 이용자가 뒤섞여 있는 것을 적발하였다. 전주교육청은 2017년 12월 6일 원고에 대하여 10일간 교습정지를 명하는 처분을 하여 열흘간 독서실 운영을 금지시켰다.

원고는 이에 불복하여 재판을 청구하였다. 재판의 쟁점은 독서실의 남녀 혼석 금지 규정이 독서실 운영자와 이용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여 무효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2심 재판을 맡았던 광주고등법원은 위 조례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고, 이에 근거한 10일간 교습정지처분도 적법하다고 원고 패소판결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와 견해를 달리하여 원고에 대하여 승소판결을 하였다. 독서실의 남녀 혼석 금지에 관한 조례 조항은 독서실 운영자의 직업수행의 자유와 독서실 이용자의 일반적 행동자유권 내지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했다.

설령 원고가 위 재판에서 패소하여 10일간 교습정지처분을 당한 후에 독서실 운영을 재개하였더라도 위 조례를 지킬 수 없다. 독서실 이용자가 각자 취향대로 좌석을 선택하여 앉는 것을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독서실 열람실 이용자는 자기 맘에 드는 좌석에 앉으려고 한다. 특히 취업이나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여 좌석에 대한 선택도 신중하다. 이성의 좌석으로 표시되었어도 개의치 않고 앉을 수 있다. 이러니 독서실의 남녀 혼석 금지에 관한 조례는 독서실 운영자가 주의를 다하여도 지키기 어렵다. 남녀 좌석 구분이 없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청년들에게 동네 독서실의 혼석 금지는 남녀 7세 부동석 시대의 고루한 처사로 보일 수 있다. 열람실 좌석을 이용자의 성별에 따라 구분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독서실 운영자와 이용자의 자율권을 통제하는 전형적인 나쁜 규제다.

권위주의 정권의 엄혹한 통제체제에서 살아온 영향 탓인지, 완장을 차고 힘 있는 자리에 오르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 낸다. 역대 정권마다 행정청의 규제가 자원배분을 왜곡시키고 공직사회의 부패를 초래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규제를 개혁하겠다고 외쳤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를 '암덩어리'라고 하면서 각 부처에 있는 규제의 숫자를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법무부는 규제 일변도로 되어 있는 변호사법의 규제 중 폐지할 것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국민의 자율과 창의를 저해하고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비효율적인 행정규제를 정비하고자 행정규제기본법을 제정·시행하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공무원들에게 규제는 민간영역에 합법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할 수 있는 권력이라서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성공 여부도 규제혁신에 달려 있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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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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