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64호 가수, 서기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2012년에 발표한 최백호 노래 '길 위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는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긴 꿈'이라는 첫 두 글자가 말해주듯, 오래 걸어온 사람의 회한과 자기 연민으로 가득하다. 가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덧없는 꿈'은 오래된 통속이다. 최백호는 통속적 슬픔을 노래하나 이를 기품 안에 가둔다. 노래가 뻔하지 않은 감각을 얻었다면, 그건 전적으로 최백호 목소리에 힘입은 것이다.
몇 달 전 화제의 음악 경연 '싱어게인2(jtbc)'에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뜻밖에도 64호 가수 서기였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무 살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심사위원이었던 이선희는 "아득할 게 뭐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세월의 아득함을 느끼기엔 스무 살 인생이 너무 짧다는 얘기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부른 '아득함'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본인의 것이라 느꼈다. 덧없음은 어느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예민하게 자각하는 사람의 것이다. 아득함은 시간의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세계와 자아의 심미적 거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서기의 감각은 분명 덧없고 아득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경연곡 대부분을 7080 레퍼토리로 채운 것 역시 이런 감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을 테다.
막 어른이 되는 스무 살은 인생의 점이지대다. 가장 치열하게 실존적 문제의식을 느끼는 나이다. 젊은 욕망은 설렘과 함께 늘 불안의 그늘을 이고 있다. 이 양가적 감정 안에서 천재적인 누군가는 섬광 같은 기운을 뿜어낸다. 생각해보라. 한국 대중가요의 명반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상당수가 20대 뮤지션들이 만든 것들이다.
64호 가수 서기가 3년 전 정미조의 노래 '귀로'를 부른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다. '귀로'는 1979년 가요계를 은퇴했던 정미조가 37년 만에 컴백하면서 발표한 노래다. 정미조가 가수에서 화가로, 다시 가수로 돌아오는 삶의 여정을 은유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가수로서의 성공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낯선 도시 파리로 떠난 시간. 그리고 운명처럼 다시 돌아온 가수의 길. 긴 여정의 끝이 마치 각본이라도 있듯 떠났던 처음의 자리가 됐다. 그래서 가사의 마지막은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다.
'귀로' 역시 '길 위에서'처럼 삶의 회한과 애틋함으로 가득한 노래다. 열일곱 살 서기의 노래에도 그 감정이 비쳤다. TV쇼를 위해 선곡한 것도 아니니, 오로지 '귀로'라는 노래가 좋아서 불렀을 것이다. 그는 삶의 먼 나중을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당길 줄 아는 뮤지션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은 조로(早老)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다. 감각의 영토가 또래의 뮤지션들보다 아주 넓다는 뜻이다.
고백하자면 '길 위에서'와 '귀로'는 내가 작사한 노래다. 노래가 실린 앨범들 역시 내가 제작했다. 좋은 어른의 음악을 한번 보여주고자 내놓은 작품들이다. 시간이 흘러 노래들이 이렇게 젊은 가수 서기와 인연이 될 줄 생각지도 못했다. 나의 언어들이 그의 몸을 통과해 낯선 표정으로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다.
어떤 예술이든 가장 근본적인 것이 가장 새롭다. 64호 가수 서기가 더 오래, 그리고 깊이 삶의 근본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그 힘으로 아주 멀리까지 가길 바란다. 그의 먼 미래가 궁금하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