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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서 수천억까지… 꼬리 무는 대규모 횡령,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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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규모 횡령 사건이 잇따르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해 내부 직원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검거된 주요 기관만 해도 오스템임플란트(2,215억 원), 우리은행(614억 원), 계양전기(245억 원), 서울 강동구청(115억 원), LG유플러스(최대 80억 원), 새마을금고(40억 원), 아모레퍼시픽(35억 원), 클리오(19억 원) 등 민관을 가리지 않고 횡령액 또한 수십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한다.
학계와 수사기관에선 기관의 허술한 내부통제 시스템, 주식·암호화폐 시장의 투기성 거래 풍조, 직원 개인의 도덕성 결여 등을 주요 범행 요인으로 꼽는다. 이런 가운데 평범한 사람이라도 3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횡령, 배임, 사기 등 경제범죄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고전적 학설, '부정 삼각형(Fraud Triangle)' 이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26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미국 범죄사회학자 도널드 크래시(Donald Cressy)는 1939년 횡령범 130여 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바탕으로 ①경제적 압박 ②횡령을 쉽게 저지를 기회 ③자기 합리화를 횡령 범죄를 유발하는 3가지 조건으로 규정하며 부정 삼각형 이론을 주창했다. 발표된 지 8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수사 현장이나 학계에선 횡령범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주요 이론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잇따르고 있는 횡령 사건들도 부정 삼각형 이론을 대입하면 발생 원인의 많은 부분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횡령 범죄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직원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 쉽게 적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최근 횡령 발생 여부를 점검하려고 내부 감사에 들어간 기업과 기관들이 많은데, 부정 삼각형 이론에 입각하면 효과적인 점검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올해 2월 검거된 계양전기 재무팀 대리 김모씨는 2016년부터 6년간 도박으로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회사 명의 통장에서 자신의 계좌로 900여 회에 걸쳐 246억 원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횡령금으로 암호화폐 및 선물옵션 투자, 도박 등을 하다가 대부분 탕진했다.
올해 적발된 주요 횡령 사건의 피의자 대부분은 김씨처럼 주식, 암호화폐, 도박 등 단기간에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위험투자에 횡령금을 투입했다. 원래부터 떠안고 있었거나 횡령액으로 투자에 나선 후 발생한 손실을 메우려다가 공금에 반복적으로 손을 대는 패턴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시중에 많은 돈이 풀린 국면이 최근까지 이어지고 금융자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한탕'을 노리는 투자 행태가 만연한 것도 횡령 범죄를 부추긴 요인으로 꼽힌다.
서 교수는 "일반인도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등을 겪으면서 경제적 압박이 생긴다"며 "이를 만회하려 회삿돈을 노리게 되면 횡령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에서 오래 근무했거나 자금 담당 부서에서 책임자급으로 일할 경우 내부통제시스템을 피해 횡령을 저지를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부정 삼각형 이론의 '기회'가 지적하는 바다. 회사 사정에 정통하고, 권한이 확대되고, 상부와 신뢰관계가 강화될수록 부정 행위에 노출될 여지도 커진다는 얘기다.
오스템임플란트 재무팀장 이모씨는 지난해 3월부터 법인 계좌에서 개인 계좌로 2,215억 원을 빼돌렸다. 일개 직원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횡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씨가 회사 자금 흐름을 총괄하는 담당 업무를 무기 삼아 잔고증명서 조작 등 내부 감시망을 무력화할 수법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 삼각형 이론은 횡령범들이 부정을 저지르면서 '잠시 빌렸다가 원상회복하겠다'며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횡령액 일부를 변제했다는 점을 내세워 감형을 호소하는 것도 이런 심리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강동구청 투자유치과 등에서 근무하면서 200여 차례에 걸쳐 공금 115억 원을 빼돌린 공무원 김모씨는 주식 투자로 77억 원을 탕진하는 와중에도 38억 원을 되돌려 놓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기관 내부에서 횡령이 벌어질 수 있는 조건들을 점검해 사전 차단하고 윤리경영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 교수는 "부정 삼각형 이론의 3가지 조건이 동시에 작용하지 않도록 내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며 "회사 자금 관련 전결권이나 취급액 수준을 분할하는 등 개인 윤리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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