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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구슬치기ㆍ베트남 무술도 같은 금메달… SEA대회에 새겨진 동남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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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고요하다. 페탕크(Petanque) 경기장에서 들리는 건 쇠로 만든 공(불)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상대팀의 불을 맞출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전부다. 첫 번째 '멘느'(라운드)가 끝나자 그제서야 자국 팀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을 내라!"는 비슷한 의미지만, 미얀마 응원단은 쩌렁쩌렁하게 "아띤타바!"라고 외쳤고, 라오스팀은 나지막이 "쑤쑤, 쑤쑤"라고 서로를 토닥였다. 쇠로 된 큰 공인 것만 다를 뿐 아무리 봐도 어린 시절 즐기던 '구슬치기' 게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선수들과 관중이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는 모습이 색다르다.
이어진 두 번째 멘느, 미얀마팀이 먼저 2개의 불을 나무공(뷧) 가까이에 붙였다. 페탕크는 6~10m 거리 안에 위치한 뷧에 각각 3개의 불을 번갈아 던져 최종적으로 뷧 근처에 남은 불의 수만큼 점수를 얻어 간다. 마지막 투구는 라오스팀의 마니반 소울리아 선수. 차분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잰 그의 불이 미얀마팀 공이 모인 지점의 정중앙을 '딱' 하고 타격했다. 미얀마팀은 고개를 떨궜고, 뷧 옆에는 라오스팀의 불만 당당히 위치해 있었다. 지난 17일 진행된 제31회 하노이 동남아시안게임(SEA) 페탕크 2인조 준결승전은 그렇게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라오스팀이 1점 차이로 승리했다.
우리에겐 생소하나 1907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페탕크는 전 세계 등록선수만 60만 명에 달하는 인기 구기 종목이다. 언뜻 유럽인들이 주름잡는 스포츠일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실제 페탕크 강호는 모두 동남아시아에 몰려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100여 년 전 페탕크를 자연스럽게 접한 라오스ㆍ캄보디아ㆍ베트남은 물론, 인접한 태국과 말레이시아 등도 페탕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한 바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 유독 페탕크에 강한 건 날씨의 영향도 크다. 페탕크는 작은 지붕 혹은 나무 그늘이 있는 평평한 땅에 불과 뷧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스포츠다. 야외 운동이 어려운 뜨거운 건기와 습한 우기에도 페탕크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베트남 페탕크협회 관계자는 25일 "우리에게 페탕크는 식민시대의 유산이라기 보다 이곳 기후에 최적화된 생활 스포츠의 측면이 강하다"며 "피지컬(육체) 능력치가 아닌 집중력과 전략으로 승부를 겨루는 점도 동남아인들이 페탕크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SEA대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격투 스포츠 보비남(Vovinam)에도 동남아의 역사는 아로새겨져 있다. 1938년 베트남의 응우옌록이 창시한 보비남은 덩치 큰 식민 지배국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지 무술이다. '힘 대 힘'으로 서양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근접 타격과 관절 꺾기 기술 등을 극대화시킨, 나름 베트남 '독립 투쟁사'의 한 단면이란 얘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보비남을 전 세계에 알린 나라는 프랑스다. 식민지배 시절 보비남에 고전했던 프랑스인들이 1973년부터 이 무술을 미국 등 서구권과 동남아 각국에 앞장서 전파한 것이다.
동남아인들의 격투 종목 사랑은 보비남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글로벌 인기 종목이 된 태권도와 가라테ㆍ우슈ㆍ킥복싱ㆍ주짓수를 포함, 태국의 '무아이타이', 말레이시아의 '펜칵 실랏', 우즈베키스탄의 '쿠라시'도 모두 SEA대회 정식 종목이다. 여기에 복싱ㆍ유도ㆍ레슬링까지 포함하면 격투 계열 스포츠가 40개 전체 종목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하노이 SEA대회 조직운영위원회 관계자는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해야 했던 동남아 남성들은 전통적으로 격투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며 "지금도 격투 스포츠 시청률이 전체 SEA대회 종목 중 상위권을 유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귀띔했다.
실내 구기 종목도 격투기 못지않게 관심도가 높다. 우리에겐 족구로 익숙한 '세팍타크로'와 동남아 국가들이 최강국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배드민턴'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두 종목의 주요 경기 결과는 하노이 SEA대회 공식 홈페이지 뉴스의 상단을 매번 장식하곤 한다. 해가 진 저녁, 공터에서 두 종목을 즐기는 시민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곳이 동남아인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e스포츠와 볼링은 '신흥 인기 종목'으로 부상했다. 과거 비주류였던 이들 종목은 하노이 SEA대회를 다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콘텐츠 중 가장 많은 클릭 수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동남아만의 특수성이 가득한 SEA대회지만 '메인'은 역시 남자 축구 경기다. 폐막식 하루 전인 지난 22일 오후 7시(현지시간)에 진행된 베트남과 태국의 결승전의 경우 티켓 암표 값만 2,000만 동(한화 100만 원)을 넘어섰다. 이는 올해 베트남 임금위원회가 발표한 하노이 최저임금 486만 동의 약 4배에 달하는 거금이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3세 이하(U-23) 대표팀이 SEA대회 2연패에 성공하자 베트남은 나라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처럼 경기가 열린 미딩 국립경기장 인근은 붉은 베트남 국기를 든 오토바이와 차량 행렬로 가득 찼고, 거리의 베트남인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하노이 SEA대회를 끝으로 U-23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박 감독을 향한 애정 역시 넘쳐났다. 미딩 경기장 앞 도로에서 만난 푸억(21)씨는 "박항세오(박 감독)가 없었다면 우리가 태국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연신 '박항세오! 베트남! 한꾸억(한국)!'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축구 2연패로 대미를 장식한 베트남은 하노이 SEA대회 종합우승국 자리에 올랐다. 베트남이 차지한 금메달은 총 205개로, 지난 1997년 자카르타 SEA대회에서 인도네시아가 획득한 194개를 뛰어넘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하노이 SEA대회 2위는 92개의 금메달을 딴 태국이며, 3위는 인도네시아(69개), 4위는 필리핀(52개)이다.
아직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에 가입하지 못한 신생국 동티모르는 은메달 2개와 동메달 3개로 꼴찌(11위)에 머물렀고, 군부 쿠데타로 내전을 겪고 있는 미얀마는 9개의 금메달로 7위를 기록했다.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라는 기조를 가진 SEA대회 조직운영위는 이번 대회 개막식에 쿠데타 군부가 임명한 미오 흘라잉 체육교육부 부장관을 미얀마 대표로서 공식 초청했다.
'국제대회 성적이 곧 국력의 표상'이라 생각하는 베트남은 잔뜩 고무된 표정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 태국과 아세안 내 경제규모 1위 인도네시아를 이번 대회에서 이겼듯, 머지않아 베트남이 동남아 최대 부국이 될 것이라 믿어 보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 팜민찐 총리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그는 박 감독의 대회 2연패 직후 "(SEA대회 남자) 축구 경기가 끝났지만 앞으로도 우리 모두는 '무적의 베트남'이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베트남이 주최국 타이틀을 떼고도 지금의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 결과는 내년 5월 제32회 SEA대회가 열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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