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의 명패와 ‘전략적 모호성’

트루먼의 명패와 ‘전략적 모호성’

입력
2022.05.2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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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박 3일의 방한 일정을 마치며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한 책상 명패 복제품.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재임 시절 탁상에 비치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The Buck Stops Here!'라고 새겨져 있다. 대통령은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라는 의미로 트루먼 대통령이 1953년 고별연설에서 인용한 문구다. 뉴스1

국제 외교무대에서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 자주 거론된 건 1979년 미·중 수교 전후부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대만을 반공전선의 철저한 우방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국과 수교 전 이미 ‘닉슨독트린’에 따라 미군 함대의 대만해협 순찰을 상당 기간 중단했고, 1972년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서명한 ‘상하이 공동성명’에서는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기도 했다.

▦ 마침내 미·중 수교 땐 대만과 단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하이 공동성명 때부터 미국은 ‘중국(China)’과 ‘중공(People’s Republic of China)’을 짐짓 같은 개념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고, 이를 당시 키신저 국무장관은 ‘건설적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중국과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모호성은 정세에 맞춰 미·중 및 미·대만 관계를 조율하는 수단이 돼왔다.

▦ 우리 외교에서의 전략적 모호성도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미·중을 상대로 한 외교전략 차원에서 거론돼왔다. 미·중 간 긴장이 본격화한 박근혜 정부 때부터 자주 얘기됐고, 문재인 정부 땐 외교 당국자들까지 직접 언급하며 마치 ‘균형외교’의 다른 말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문 정부 때 전략적 모호성은 ‘사드사태’ 때처럼, 전략적 입장조차 정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뭉개다 더 큰 외교적 부담을 지는 ‘결정장애’ 형태로 자주 노출됐다.

▦ 외교는 본래 모호한 언어와 입장이 뒤엉킨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모호성은 외형일 뿐, 실제론 명확한 전략적 입장이 필수인 건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문 정부에선 그런 외형과 내용이 자주 혼동된 면이 있었다. 최근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과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유명한 책상패 복제품을 선물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에 대한 격려를 넘어, 외교적으론 결정장애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착각하지 말고, 결단하고 감당하는 새 외교를 주문한 것처럼 느껴진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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