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게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집에 규범은 없다. 거실에 TV를 놓고 맞은편에 꼭 소파를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같은 평면에 살아도 사람이 다르면 집도 제각각이어야 할 텐데, 다들 가구 배치조차 똑같은 집에 살기를 자처한다. 사람이 집에 맞춰 살고 있다는 증거다. 정진욱(32), 이유림(29) 부부의 신혼집인 서울 중구의 이치하우스(대지면적 56.43㎡, 연면적 49.82㎡)는 집의 암묵적 규범에서 해방된 집이다.
이치하우스에는 흔히 살림집 필수가전이라고 여기는 가스레인지도, 인덕션도 없다. 반대로 공간이 부족할 때 쉽게 샤워부스로 대체되는 욕조가 큼지막하게 놓여 있다. 사는 사람에게 딱 맞춘 집이라 그렇다.
가파른 언덕 중간쯤, 숨을 고르는 집
이치하우스는 1층 8평, 2층 7평의 작은 집이다. 신당동 성곽공원 인근 골목길의 계단 옆에 위치한다. 빽빽한 다세대, 다가구 주택 틈새에 자리한 집은 가로로 길고 세로로 좁은 납작한 외관이다.
기존에 1층과 2층이 분리된 가구였던 집을 한 가구로 합치면서 1층에 주방과 테라스가 있는 공용 공간, 2층에 부부의 침실과 건식·습식 화장실을 배치했다. 공간 디자이너인 부부는 1층을 사무실(아틀리에 이치)로도 쓴다.
부부는 예산에 맞춰 서울시내 50여 개 단독주택을 샅샅이 살피다 상태가 가장 양호했던 이 집을 매입했다. 비교적 최근인 2007년에 지어져 누수, 단열 등의 문제가 없어 공사비가 적게 들 것으로 판단했다. 걸어서 반려견 조림이와 산책할 수 있는 성곽길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이 소장은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규격화된 집에 들어가기보다 저희한테 맞는 공간을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한 장당 500원 하는 치장벽돌, 무늬목 필름, 강마루 등 저렴한 자재를 사용해, 집을 고치는 데 7,000만 원(매입비, 설계비 제외)이 들었다.
구조적으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출입구의 위치다. 이전에는 1, 2층 가구 모두 현관문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나 있었다. 부부는 현관으로 드나드는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구를 건물 뒤쪽으로 돌려 배치했다. 건물을 돌아 들어가는 통로 바닥에는 이곳에 버려져 있던 구들장을 깔았다.
구들장은 옆 건물의 석축과 어우러지며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구들장은 밟을 때마다 덜컹거리며 도심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기분 좋은 생경함을 전한다.
부부는 집이 시각적으로 "숨을 고를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랐다. 좁은 골목의 밀집된 건물을 지나서, 높은 계단을 올라서, 이 집을 마주했을 때 한 줄기 휴식 같은 느낌을 주기를 원했다. 스타코로 마감돼 있던 기존 외벽에 아이보리 색 벽돌을 쌓아 어두침침한 골목이 환해 보일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창가 쪽은 '영롱쌓기(벽돌을 구조용이 아닌 치장용 목적으로 쌓는 것)' 방식을 택해 실내의 빛과 사람의 실루엣이 외부에 보이기를 의도했다. 밤이 되면 집 자체가 커다란 가로등처럼 골목을 밝힌다. 실제로도 집 앞 계단에 자작나무가 있는 작은 정원을 만들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고, 집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서 콘크리트 빌딩 숲에 생기를 주고자 했다.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장점을 극대화한 집
좁은 집이라 선택과 집중은 필수였다. 1층 공용 공간은 아파트로 치면 거실의 역할을 하지만 소파나 TV가 없다. 대신 길이 4m의 기다란 테이블을 두었다. 최대 12명까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밥을 먹는 식탁이 되기도 하고, 일을 하는 책상이 되기도 한다.
널찍한 테이블은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기에도, 사무실에 찾아온 고객들과 회의를 할 때도 유용하다. 주방에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인덕션을 과감히 포기했다. 요리할 때는 버너를 사용한다.
반대로 욕조는 빼지 않았다. 2층에는 건식 화장실과 별도로 조적식 욕조가 있다. 평면이 다각형 구조인 데다 2층 현관문이 있던 자리라 다른 공간으로 활용하기 애매했던 공간을 통째로 욕조로 만들었다. 어두운 색깔의 타일을 깔아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원래도 입욕을 좋아했던 부부는 요즘 약초 입욕에 빠져 있다. 정 소장은 "집을 설계하면서 저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좀 더 힘을 실어주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렸다"며 "소파도, 인덕션도 넣을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좁은 집이 어정쩡하고 불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점을 극대화한 집인 셈이다.
집을 쓱 둘러보면 1층의 식탁, 2층의 침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가전, 가구가 보이지 않는다. 다 숨어 있어서다. 부부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아주 작은 자투리 공간도 남김없이 수납 공간으로 활용했다.
벽처럼 보이는데 눌러 열면 그 안에 전자레인지,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 옷이 들어가 있는 식이다. 냉장고도 매립식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벽과 수납장은 물론, 천장부터 바닥까지 같은 색상으로 통일해 넓어 보이는 효과를 꾀했다. 구석구석 낭비되는 공간 없이 썼더니 짐이 적지 않은 편인데도 수납 공간이 남는다.
서울 단독주택? "넘사벽 아니에요"
집이 지난해 4월 준공됐으니, 부부는 이 집에 산 지 딱 1년이 됐다. 욕조에 누워 피로를 풀다가도, 지금처럼 날이 좋은 날 1층 테라스에 나가 햇볕을 쬐다가도 문득 "집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윈스턴 처칠이 사람은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잖아요. 이전 집에서는 휴일이 되면 항상 누워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집에서는 1층에 내려와 있으면 앉아 있게 되고, 앉아 있으면 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게 돼요. 그런 식으로 삶의 패턴에 작지만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이들은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도, 누구나 단독주택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남들 같은 집이 아닌, 나다운 집이 나온다.
"다들 남향, 동향이 좋다고 하지만 직업군에 따라서 꼭 그 향에 살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오히려 매일 노을을 볼 수 있는 서향이 좋을 수도 있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알고 또 필요할 때는 포기할 줄 아는 과감함이 있다면, 저희처럼 서울 도심에서도 단독주택에 살 수 있다는 것을 많은 분이 알고 도전해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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