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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사내아이의 자유'를, 왜 보장해줘야 하나

입력
2022.05.21 04:30
12면

<71> 윤재순의 시가 진짜 해로운 이유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윤재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이 지난 1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성비위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윤재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이 지난 1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성비위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윤재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이 2002년에 출간한 시집에 실린 시 '전동차에서'를 보자. "전동차에서만은 / 짓궂은 사내아이들의 자유가 / 그래도 보장된 곳이기도 하지요"라며 윤 비서관은 법으로 금지된 성폭력을 '사내아이들의 자유'라고 표현했다. 이어 성추행 장면을 묘사한 후, "그래도 말을 하지 못하는 계집아이는 / 슬며시 몸을 비틀고 얼굴을 붉히고만 있어요 / 다음 정거장을 기다릴 뿐 / 아무런 말이 없어요"라며 범죄에 분노한 피해자의 심리를 왜곡하고 맺는다.

성추행 옹호 논란에 휩싸인 윤재순의 시

이준석(가운데) 국민의힘 대표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준석(가운데) 국민의힘 대표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 비서관은 1996년과 2012년 성추행과 직장 내 성희롱으로 두 번이나 인사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이 시까지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 이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6일 "국민들에게 충분하게 사과하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윤 비서관이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했던 여러 표현은 지난 20여 년간 바뀐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국민들의 시각과 큰 차이가 있다"고 윤 비서관을 감싸주는 발언도 했다.

괴이하다. 기준이 지난 20년간 바뀌었다니? 20년 전에도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1994년 1월에 제정돼 4월부터 시행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는 공중밀집장소 추행죄가 있다. 30여 년 전부터 지하철 추행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1조에 의해 국가가 법으로 처벌하는 범죄였다. 윤 비서관이 그 시집을 출간한 것은 2002년이다. 게다가 검찰에서 일한 사람이 성폭력 관련 특별법이 존재한다는 것를 몰랐을 리가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궁금하다. 이 대표가 말하는 '일반적인 국민들의 시각'이란 과연 무엇인가. 대검찰청이 지난해 1분기에 발간한 '분기별 범죄동향리포트'에 따르면 지하철 성추행 범죄 발생 건수는 128건이다. 신고돼 집계된 건수가 128건이다. 겨우 한 해의 4분의 1 정도 되는 기간에 128건만 발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 성추행은 훨씬 더 많이 발생하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본 범죄다. 그렇다면 이 대표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국민’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비난을 받자 윤 비서관은 성추행을 옹호하는 시가 아니라 성추행하는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라고 밝혔다. 지난 15일 한 남성 시인도 "실패한 고발시, 실패한 풍자시, 실패한 비판시일 수는 있어도 '성추행 옹호 시'라고 보이진 않는다"고 평했다.

YTN이 지난 17일 보도한 2001년 출간된 시집 '석양의 찻잔'에 실린 윤 비서관의 시 '전동차에서'의 원본. YTN 뉴스 캡처

YTN이 지난 17일 보도한 2001년 출간된 시집 '석양의 찻잔'에 실린 윤 비서관의 시 '전동차에서'의 원본. YTN 뉴스 캡처

그런가? 17일 YTN이 보도한 이 시의 원문을 보자. 세상에 먼저 알려진 시는 2002년 출간본이지만 그보다 1년 전 출간된 시집 '석양의 찻잔'에 실린 원시에는 '전철 칸의 묘미'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요즘은 여성전용칸이라는 법을 만들어 그런 남자아이의 자유도 박탈하여 버렸다나"라고 끝난다. 그렇다면 이 시는 풍자시인 것이 맞다. 바로 '남자아이의 성추행할 자유를 박탈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시. 비판시인 것도 맞다. '남자아이들의 짖궂은 장난을 법으로씩이나 처벌하는 것'을 비판하는 시.

가부장 사회에 저항한 로미오와 줄리엣

이 시가 왜 문제일까? 성범죄를 옹호해서? 왜곡된 성의식을 드러내서? 둘 다 맞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 시는 사회에 해롭다. 셰익스피어의 1597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현재 국내 유명 남성 작가의 작품을 예로 들면 더 이해가 빠르겠지만, 그 작가를 공격하는 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예시는 누구나 다 들어본 것, 친숙한 것으로 들어야 효과적이니까 말이다.

영화 '셰익스피어 글로브: 로미오와 줄리엣'의 포스터. 다음영화 캡처

영화 '셰익스피어 글로브: 로미오와 줄리엣'의 포스터. 다음영화 캡처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의 대립과 운명의 장난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연인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지난번에 쓴 신데렐라 이야기(관련기사 ☞ 신데렐라는 '신분상승' 아닌 '평등' 이야기다)도 그렇고 춘향전도 그렇고 '사랑'을 내세운 고전 명작들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적 주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오, 로미오. 당신은 어째서 로미오입니까? 저를 위해 아버지를 버려주세요. 당신의 이름을 버려주세요. 그러기가 싫으시다면 하다 못해 저하고 언약한 애인이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저도 캐풀렛이라는 이름을 버리겠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중

유명한 발코니 장면이다. 로미오는 가장 무도회에서 만난 줄리엣을 잊지 못한다. 밤중에 줄리엣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줄리엣 방의 발코니 아래에 숨는다. 줄리엣도 로미오를 생각하며 깨어 있었다. 줄리엣은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여고 나와서 밤하늘에 대고 외친다. 이름을 버려 달라고. 자신도 이름을 버리겠노라고. 여기서 이름이란 패밀리 네임인 성(姓)을 말한다. 성이란 집안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성을 버리겠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한 집안을 버리겠다는 말이다. 호적을 파고 가장인 아버지의 질서 밖으로 나오겠다는 말이다. 그들은 사랑을 위하여 집안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중세적 질서 자체에 저항할 각오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던 당시 이탈리아 귀족들은 태어난 가문의 정치적 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결혼해야만 했다. 가문의 정치적 노선이란 교황당과 황제당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한다. 베로나의 경우, 13~14세기에 두 정파의 대립이 최악이었는데 바로 이 시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주제는 교황과 황제와 아버지가 지배하는 중세적 질서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이 된다.

가부장 사회 결속 도구가 되는 여성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유튜브 캡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유튜브 캡처

교황이건 황제건 아버지건, 모두 한 조직의 가부장들이다. 이 가부장들은 정적과 전쟁을 치르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젊은 전사들이 필요하다. 남성들의 세상을 지배하려면 남성들의 조직을 잘 관리해야 한다. 우리 조직이 최고임을 세뇌하고 어린 남성들이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길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맨입으로는 안 된다. 이익을 나눠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부장의 권리를 나눠주면 자기의 지배 권력이 줄어들지 않는가? 하극상이 생기지 않은가?

이에 남성 지배자들은 하급 남성들, 어린 남성들에게 이성애자 남성 아닌 다른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시각을 심어주고 그들을 지배할 권리를 주는 방식을 쓴다. 대표적인 방식이 여성 차별과 멸시를 가르치는 것. 여성을 인간 아닌 사물로 여기도록 만들면 상대적으로 남성 간의 유대가 공고해진다. 그러기에 가문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정략 결혼을 강요해도 로미오 아닌 다른 청년 남성들은 불만이 없는 것이다. 여자란 물건이어서 중요하지 않으니까,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혼인 외 관계에서 여성을 골라 이용할 수 있다고 세뇌당해 있으니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 세뇌 방식은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의 노래에 잘 드러나 있다. 티볼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자를 사물로 여기고 무시하도록 가르쳤다. 남성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고 연상의 남성에게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아들이 로미오처럼 일개 여성에게 사랑을 느껴 아버지를 거역하고 가문을 망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물로 보게 세뇌하는 것, 새끼 가부장에게 하급 인간인 여성을 이용할 권력을 주어 상급 가부장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남성 조직에 충성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호모소셜(homosocial·남성유대) 사회가 권력을 유지하는 기본 방식이다.

윤재순의 시는 가부장 사회를 가르친다

시 '전동차에서'로 돌아가자. 윤 비서관은 시에서 말한다. 전동차에서 짓궂은 사내아이들의 성추행할 자유를 보장해주라고. 피해당하는 여성은 그래도 얼굴만 붉힐뿐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상하다. 시를 쓴 중년 남성의 입장에서 사내아이들의 그 '자유'가 왜 그렇게나 중요할까?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는 2013년 여학생들의 교복 치마를 들추고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조선닷컴 캡처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는 2013년 여학생들의 교복 치마를 들추고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조선닷컴 캡처

그것은 바로 어린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 하급 인간으로 여기는 경험을 쌓아야 아는 형님, 직장 선배나 상사 등 온갖 연상의 남성들을 진짜 인간으로 여겨 복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기성세대 남성이자 어떤 조직에서는 가장인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과거 아이스케키하거나 여자 짝꿍 때리는 남자아이에게 어른들이 관대했던 이유다. 어차피 성인 남성이 되면 알아야 할 여성을 지배하는 방법을 좀 빨리 행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짓궂은 사내아이들의 자유'일 뿐.

결국 윤 비서관은 이 시를 통해 어린 세대 남성들에게 여성을 이용하여 호모소셜 사회를 유지하는 일원이 되는 방식을 학습시켜주고 있다. 성추행 미화 정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는 사회에 해롭다. 참 해롭다.


박신영

박신영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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