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밋하고 무난한 건 망한 거야!' 열혈 편집자의 필살기 [일잼포인트]

입력
2022.05.18 14:00
수정
2022.11.1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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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베스트셀러 편집자' 이야기장수 이연실 ②

편집자주

‘일잼 포인트’는 ‘일잼 원정대’에 소개된 인터뷰이들의 ‘일하는 자아’를 분석하고, 이들만의 ‘일잘 비법’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 이연실 이야기장수 편집자 '일잼원정대' 인터뷰 읽고 오기 (관련기사 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51711350000277

이야기장수의 두 번째 책 원고를 살펴보고 있는 이연실 편집자. 그는 말했다. "내가 열렬하게 좋아하고 잘해 낼 수 있는 이야기만 책으로 만들 것이다." 김하겸 인턴기자

이야기장수의 두 번째 책 원고를 살펴보고 있는 이연실 편집자. 그는 말했다. "내가 열렬하게 좋아하고 잘해 낼 수 있는 이야기만 책으로 만들 것이다." 김하겸 인턴기자

이연실(39). ‘열(熱)’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모든 단어들의 주인 같은 인물입니다. 좋아하는 게 많아 항상 뭔가에 열렬(熱烈)하게 열광(熱狂)하고 있는 사람, 일터에선 못 말리는 열의(熱意)를 가진 열혈(熱血) 편집자거든요. 신입사원 시절, 아직 중쇄 한 번 못 찍어본 꼬맹이 신입이 “이건 베스트셀러가 될 책입니다!”라고 하도 말하고 다녀서, 별명이 (베스트셀러 한번도 못 내 본) ‘베스트셀러 편집자’였을 정도였다니까요. (물론 불과 몇 년 후에 그 별명을 따라가긴 했지만요.)

입사 초기엔 넘쳐 흐른 이 열의에 스스로 미끄러져 넘어질 때도 있었대요. 다른 별명이 ‘사고의 여왕’이었을 정도로요. 연실씨가 사고를 칠 때마다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연실아. 시도를 많이 하니까, 사고도 많이 치는 거다.” 그때의 연실씨가 책임질 게 두려워 도전조차 겁냈다면 아마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놓쳤겠죠.

숱한 삽질, 도전과 실패를 거쳐 그가 정립한 ‘열혈 편집자로서의 기술’ 네 가지를 정리해 봤습니다. 편집자로서의 기술이기도 하지만, 어떤 일터에서든 적용될 법한 ‘보편적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슬아 작가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된다' 코멘터리북. 책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성스러운 코멘트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김하겸 인턴기자

이슬아 작가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된다' 코멘터리북. 책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성스러운 코멘트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김하겸 인턴기자


열혈 기술 1 : 밋밋하고 무난한 건 망한 거야 ‘멱살’ 잡는 첫인상 만들기

연실씨가 편집자로서 가장 ‘장인다운’ 면모를 드러내는 때는 바로 ‘제목을 지을 때’입니다. 제목만큼은 절대로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는다고 해요. 보통 작가들은 좀 ‘얌전한 제목’을 선호한대요. 글의 요지를 정직하게 담아낸 점잖은 제목이요. 하지만 연실씨는 ‘무난하고 밋밋하다’는 느낌이 드는 제목은 곧 망한 제목으로 여긴답니다. 왜냐. 에세이는 제목의 위력이 매우 큰 장르거든요. 심지어는 ‘저자발’보다 ‘제목발’이 더 중요할 정도로요.

연실씨는 제목을 지을 때, 이미 마르고 닳도록 봤던 원고를 샅샅이 다시 읽는다고 해요. 인상 깊은 단어나 구절을 커다란 백지에 옮겨 적으며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보면, 단어들끼리 예상치도 못한 조합으로 만나서 ‘이거다!’ 싶은 제목으로 불꽃을 튀기며 등장하니까요. 연실씨가 담당했던 책들의 가제와 최종 제목을 비교해보면,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지 않은’ 그의 끈기가 어떻게 빛을 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실씨가 제목에 필살기를 발휘한 세 권의 책들.

연실씨가 제목에 필살기를 발휘한 세 권의 책들.

정여울 작가의 평론집 <기억의 연금술>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이슬아 작가의 수필집 <다정한 날들> <나는 울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된다>

차 전문가 이근수의 산문 <녹차이야기> <푸른 화두를 마시다>

어때요, ‘제목’에 목숨 걸만 하죠?

‘무난하면 망한다’는 신조는 글의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보통 작가들은 ‘회심의 일격’인 꼭지를 뒤로 빼놓고 싶어해요. 더구나 가장 힘주어 쓴 글엔 대개 내밀한 기억을 담기 때문에 숨겨놓고 싶어하죠. 반면, 연실씨는 가장 뜨겁고 강렬하게 읽히는 꼭지를 맨 앞으로 뺀다고 해요. 첫 30쪽 안에 독자를 사로잡지 못하면 선택받지 못할 확률이 높거든요. 회전율 높은 에세이 매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독자의 ‘눈길’만 끄는 게 아니라 ‘멱살을 잡아야’ 하니까요.

첫인상은 표지 디자인에서 판가름나기도 한다. 연실씨는 갤러리를 누비고 인스타그램을 뒤지며 언젠가 책의 얼굴이 되기에 좋을 그림들을 보부상처럼 수집한다. 디자이너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위 두 권의 표지가 나왔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왼쪽)의 표지엔 정이지 작가의 회화 작품을 썼고, '미친 사랑의 서'(오른쪽)에는 중국 화가 원우의 유화를 썼다. 원우의 그림은 '언젠가 환장할 것 같은 열기가 배어 있는 원고를 만나면 쓰려고' 아껴뒀던 그림이다. 표지의 아름다움이 중쇄 찍는 데 한몫했다.

첫인상은 표지 디자인에서 판가름나기도 한다. 연실씨는 갤러리를 누비고 인스타그램을 뒤지며 언젠가 책의 얼굴이 되기에 좋을 그림들을 보부상처럼 수집한다. 디자이너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위 두 권의 표지가 나왔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왼쪽)의 표지엔 정이지 작가의 회화 작품을 썼고, '미친 사랑의 서'(오른쪽)에는 중국 화가 원우의 유화를 썼다. 원우의 그림은 '언젠가 환장할 것 같은 열기가 배어 있는 원고를 만나면 쓰려고' 아껴뒀던 그림이다. 표지의 아름다움이 중쇄 찍는 데 한몫했다.


열혈 기술 2 : 쫄깃하게 만들고 싶어? 좁혀라 좁혀라 좁혀라 얍!

<걷는 사람, 하정우>는 배우이자 연출가, 화가이자 작가이기도 한 다능인 하정우에게서 오직 ‘걷기의 달인’이라는 정체성만 남겨 만든 책입니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마지막 쪽까지 달리게 만들 정도로 흡입력이 강력해요. 전 국민이 아는 배우가 하루 3만 보씩 걸어 출퇴근을 한다고? 비행기 타러 강남에서 김포까지 걸어간다고? 톱스타와 걷기, ‘의외의 조합’인 만큼 흥미로운 거죠.

하정우 작가의 두 번째 책 '걷는 사람, 하정우'. 걷기가 주인공인 책이지만, 화가 하정우, 배우 하정우, 감독 하정우, 먹는 하정우, 요리하는 하정우, 온갖 하정우가 고스란히 담겼다.

하정우 작가의 두 번째 책 '걷는 사람, 하정우'. 걷기가 주인공인 책이지만, 화가 하정우, 배우 하정우, 감독 하정우, 먹는 하정우, 요리하는 하정우, 온갖 하정우가 고스란히 담겼다.


에세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걷는 사람’을 내세운 건 연실씨의 아이디어였다고 해요. '걷기’로 책을 만들자 했더니, 처음엔 하정우씨도 걱정이 컸답니다. "과연 걷기만으로 한 권의 책이 될까요?" 거듭 물었으니까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요. 이야기의 그릇에 무조건 많은 걸 담으면 감동이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거든요. 산만하고 흐리멍덩해질 뿐이죠. 가짓수가 많아지면 밀도가 낮아지거든요.”

연실씨는 소설 쓰기를 배울 때 익힌 원칙을 에세이 만들기에도 적용합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한 축을 통제해야 이야기의 재미가 올라간다.

“<오징어 게임>이 쫄깃한 이유는 온갖 군상을 하나의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게임을 시키기 때문이죠. 영화 <기생충>이 재미있는 것 역시, 계급을 ‘저택의 지상과 지하’라는 수직적 공간 안에 위치시키기 때문이고요. 에세이를 만들 때도 이런 ‘축’을 만들어야 해요. 하정우 작가의 경우 딱 ‘걷기’라는 축만 남긴 거죠.”

에세이를 넘어 ‘팔리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이들이라면 참고해 볼 만한 원칙이에요. 독자의 말초신경을 제대로 겨냥한 ‘어퍼컷’을 만들려면, 버리고 버리고 버려서, 결정적 장면만을 남길 것.

여덟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연실씨가 가장 많이 쓴 말은 '미친 듯이' 였다. 과연 열혈 편집자다웠다. 김하겸 인턴기자

여덟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연실씨가 가장 많이 쓴 말은 '미친 듯이' 였다. 과연 열혈 편집자다웠다. 김하겸 인턴기자


열혈 기술 3 : 내 추진력의 원천은 ‘보고’ 또 ‘보고’

연실씨가 가진 커리어 강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진행력이 좋다’는 겁니다. 편집자의 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협업’인데요. 작가와 디자이너, 마케터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뜻을 ‘하나로 이어야’ 해요. 진행력이 좋다는 건 곧 ‘소통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김훈과 이연실 편집자.

소설가 김훈과 이연실 편집자.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연실아! 일은 딱 하나만 잘하면 된다. 보고다.' 뭐가 잘못 됐을 때 지체 말고 바로 바로 보고할 수 있는 거. 그거 하나면 대부분이 해결된다고요.”

엥? 묘수라는 게 고작 보고라고?’ 싶을 수 있지만, 예상외로 ‘신속한 보고’의 힘은 강력해요. 기본 중의 기본 같지만, 눈치 문화가 발달한 한국의 직장에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혼자 싸매고 고민할 땐 하늘이 무너지는 일 같던 것도, 다같이 힘을 합하면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이건 연실씨가 ‘사고의 여왕’ 시절 터득한 노하우입니다. 크든 작든 뭔 일이 나면 바로 “저 사고 쳤습니다! 도와주십쇼!” 외칠 수 있는 그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는 태도를 선배들이 무척 높이 사줬다고 하네요.

그 습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해요. 이제 더 이상 사고를 치진 않지만, 함께 합을 맞추는 모든 동료에게 최대한 자주 일의 진행 상황을 알리는 거죠. 협업하는 관계에서 일이 막히지 않고 굴러가게 하는 사소하지만 무척 중요한 습관입니다.

연실씨가 문학동네 신선아 디자이너와 함께 인쇄감리를 보고 있다. 편집자의 일은 기본적으로 '협업'이다. 박지윤 기자

연실씨가 문학동네 신선아 디자이너와 함께 인쇄감리를 보고 있다. 편집자의 일은 기본적으로 '협업'이다. 박지윤 기자


열혈 기술 4 : 설득의 신이 등판해도 꺾을 수 없는 뜻은 냅다 좋아해버린다

연실씨의 교정지는 ‘작가에게 전하는 편지’로 빼곡해요. ‘왜 이렇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꼼꼼하게 근거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렇게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오는데 작가가 쉽사리 의견을 굽히지 않을 땐, 휴대폰을 조용히 내려두고 그를 찾아가죠. 출판시장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본 ‘이야기 장수’의 관점에서, 또 35년 경력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독자의 관점에서 ‘왜 이게 더 나은지’ 설득하죠. 일을 하면서 ‘설득의 기술’이라는 이름의 책 한 권을 써도 될 정도로 도가 튼 이유입니다. 문제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도 설득이 되지 않을 때 발생하죠.

연실씨의 교정지는 작가에게 전하는 편지의 글로 언제나 빽빽하다. 김하겸 인턴기자

연실씨의 교정지는 작가에게 전하는 편지의 글로 언제나 빽빽하다. 김하겸 인턴기자

“작가가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아, 이건 안 되는 거구나’ 확실히 마음을 접어버려요. 그리고 그때부터 작가의 뜻을 좋아해버립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데’ 싶었어도, 모든 미련과 의심을 다 지워요.”

말이 쉽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감정을 섞거든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뒤끝을 부리며 내내 불평을 하는가 하면, 일의 결과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으면 ‘옳다구나’ 싶어 신나게 탓을 합니다. ‘거봐, 내가 맞았잖아’ 하고요.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작가를 설득하고 본인의 뜻을 이루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연실씨는 설득보다 중요한 게 ‘수긍’이라고 해요. 작가의 결정을 탓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거죠. 결국 표지에 자기 이름 걸고 자신의 삶을 건 건 작가니까.

그래서 연실씨는 이미 ‘오케이’가 난 최종 원고에 대해서는 절대로 ‘만약에’를 논하지 않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버전이 더할 나위 없는 최고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 책을 좋아하고 사랑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안 되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이미 결정한 것들을 탓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에요. 일이 굴러가게 하려면 사사로운 감정들을 버려야 해요. 탓하는 마음을요.”

마지못해 수긍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모든 조건을 ‘좋아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연실씨가 가진 ‘최상급 필살기’가 아닐까요.

이연실 편집자의 16년 직업 인생을 거르고 걸러 담은 책 '에세이 만드는 법'. 기획부터 제목 잡기, 디자인, 띠지 문안, 표지 카피, 마케팅 전략, 보도자료 쓰기에 이르기까지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품을 아끼지 않는' 자신의 노하우를 정리해 담았다.

이연실 편집자의 16년 직업 인생을 거르고 걸러 담은 책 '에세이 만드는 법'. 기획부터 제목 잡기, 디자인, 띠지 문안, 표지 카피, 마케팅 전략, 보도자료 쓰기에 이르기까지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품을 아끼지 않는' 자신의 노하우를 정리해 담았다.


▶ 이연실 이야기장수 편집자 '일잼원정대' 인터뷰 읽고 오기 (관련기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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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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