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권에 기대는 헌혈...혈액 모자라자 1+1 프로모션까지 등장

입력
2022.05.21 04:30
제3회 기획취재공모전 최우수상작
[K-구혈기(求血記)]
③ 미봉의 연속, 헌혈정책

편집자주

한국일보 제3회 기획취재 공모전에 당선된 최우수상 1편과 우수상 2편을 게재합니다. 이번 주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K-구혈기(求血記)'로 심각한 혈액난의 현실과 부족한 정부 대응을 조명합니다.

헌혈의집 영등포센터에 붙은 헌혈 참여 독려 현수막.

“가산점이나 선물을 챙겨주지 않으면 헌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갓 스물이 된 안병화씨는 살면서 헌혈을 두 번 했다. 이제는 하지 않는다. 입대를 위해 필요한 군 가산점을 모두 채웠기 때문이다. 소정의 대가로 헌혈할 사람을 유혹하는 방식은 더 이상 혈액난의 해법이 아닌 것이다. 그냥 땜질식 처방에 가깝다.

적십자사는 현실적으로 ‘상품권 뿌리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팬데믹 이후 혈액난이 심각해지면서 군대·학교 등에서 실시하는 단체헌혈 수가 줄었다. 기념품을 받기 위해 헌혈하던 사람들도 발길을 끊었다. 적십자사가 2019년 약 13억 원에 머물렀던 문화상품권 예산을 올해 약 104억 원까지 올린 이유다. 더 많은 대가를 주고서라도 헌혈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붙잡아야만 해서다.

슬금슬금 갈 데까지 간 ‘상품권 뿌리기’

대가성 기념품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다. 강주성 간병시민연대 활동가는 “10대 때는 영화 관람권을 받는다고 헌혈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며 “나이가 들면 꾸준히 헌혈하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국제적십자사가 안정적인 혈액 공급을 위해 '자발적이고 보상 없는 헌혈(VNRBD)'을 강조한다.

VNRBD를 적용하는 선진국에서는 10대가 지나도 헌혈을 많이 한다. 일본과 대만에서는 30대 이상이 헌혈을 책임지고 있다. 2020년 일본과 대만의 10~20대 헌혈 비중은 각각 18.1%, 31.5%다. 10~20대 헌혈자가 55.7%로 가장 많고 30대를 넘어가면서 수가 줄어드는 한국과는 체질부터 다르다. 임영애 아주대학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저출산 고령화로 젊은 피가 줄어들 미래에는 한국의 혈액난이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대한적십자사는 2011년 “헌혈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다”며 “문화상품권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떨어지는 혈액 잔고에 적십자사는 말을 바꿨다. 취재진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에 등록된 ‘헌혈자 공동 기념품’ 입찰공고를 전수조사했다. 대한적십자사는 2019년부터 문화상품권을 다시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현금성 기념품도 대폭 확대됐다. 정부가 올해 들어 헌혈자들에게 제공한 대가성 물품의 목록을 살펴보면, ‘여행용품 세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5,000원에서 1만 원 사이 현금성 교환권뿐이었다. 교환권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5년 전 2017년까지만 해도 ‘구급 가방’ ‘비타민C’ ‘보틀’ 등 기념 소품들 위주였다면, 지난해 들어 ‘외식 상품권’ ‘편의점 상품권’ ‘모바일 멀티 상품권’까지 등장했다.

문화상품권에 대한 예산액은 올해까지 3년 동안 8배 이상 늘었다. 올해는 모바일을 포함해 문화상품권만 104억 원 이상 구매할 계획이다. 예산을 반영해 실제로 구매한 문화상품권의 총 수량도 2019년 약 26만 매에서 지난해 116만 매까지 늘었다.

상품권 이달만 ‘1+1’... “편의점도 아니고”

지난달 13일 헌혈의집 홍대센터 앞에 '1+1 헌혈 기념품'을 홍보하는 패널들이 붙어 있다

헌혈의집 홍대센터 앞. ‘1+1 프로모션’을 적용해 상품권을 주겠다는 홍보물이 붙었다. 평소에는 한 장 주던 문화상품권·영화관람권을 두 장 주는 행사다. 편의점처럼 교차해서 지급받을 수도 있다. 한마음혈액원 헌혈카페도 이에 질세라 전체 지역에서 ‘특별기념품’을 도입했다.

현장 센터 직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헌혈의집 성안길센터 관계자는 “1+1 행사를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관심을 가져준다”고 했다. 신촌센터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프로모션이라도 해야 헌혈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경기혈액원은 지난해 6월 헌혈자에게 방탄소년단, 마마무 문별 정규 앨범을 지급한 데 이어 올해 4월에도 혈소판 헌혈자에게 트로트 가수 장민호의 앨범을 600장 한정 지급하는 이벤트를 내걸었다. 경기혈액원 관계자는 “아이돌 앨범 지급 프로모션으로 혈액 보유량이 5.1일에 도달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는 2020년 5월 헌혈자에게 추첨을 통해 방탄소년단 앨범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했고(왼쪽) 제주혈액원은 올 한 해 동안 씨월드고속페리호 탑승권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

피를 나누고 받는 헌혈증은 주요 관광지에서 ‘할인 쿠폰’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부산혈액원은 올해 들어 부산 지역 유명 관광지와 업무 협약을 맺고, 헌혈증을 제시하면 입장권을 30% 할인받도록 했다. 제주혈액원은 올 한 해 동안 헌혈증을 내면 제주도행 씨월드고속페리호 탑승권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이벤트를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헌혈자들 사이에서는 헌혈하고 받은 상품권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상품권깡’도 나타났다. 중고거래 플랫폼에 헌혈로 받은 영화 관람권 2장을 1만6,000원에 올려 둔 한 누리꾼은 “종종 기념품을 판다”며 “볼 만한 영화는 없지만 상품권을 팔면 괜찮은 값을 챙길 수 있다”고 말했다. 헌혈의 대가가 현금에 준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정부가 약속한 헌혈교육, ‘공수표’ 될 판

지난해 12월 6일 혈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부가 적극적인 헌혈기부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조항(제4조)이 핵심이다. 국회가 ‘자발적인 헌혈기부문화’ 조성에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한 셈이다.

이에 정부는 ‘자발적인 기부문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자발적 헌혈자가 많아져야 대가성 상품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20년 12월 ‘제1차 혈액관리 기본계획(2021~2025)’을 발표했다. ‘미래 헌혈교육’, ‘직장인 헌혈교육’ 등 헌혈 문화 교육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예비 헌혈자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헌혈교육은 수년째 지지부진하다.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강원도에서 ‘미래 헌혈교육’을 시범운영하고 이후 전국에 대해 정규교육 과정으로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 봉사활동 영역으로 ‘헌혈’이 언급은 되어 있다”면서도 “헌혈 정규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직장인 교육은 학생보다도 불모지다. 정부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2021년부터 온라인 학습 플랫폼인 나라배움터에서 헌혈 정규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했지만, 이곳에 등재된 헌혈교육 콘텐츠는 2017년 12월에 올라온 영상 자료가 유일하다. 이마저도 임시로 YTN사이언스 프로그램을 발췌한 영상이다. 나라배움터 스마트개발과 관계자는 “헌혈교육 개발 및 추진과 관련해 알고 있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헌혈의집 찾지 않는 사람들, 대안은?

일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 Leaf 헌혈 룸'은 헌혈자를 위한 북카페와 문화 공간을 마련해 뒀다. SAMBA PORTFOLIO 홈페이지

일각에서는 헌혈의집을 생활밀착형 교육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예컨대 일본의 적십자 혈액센터는 헌혈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건물 한 층의 일부만을 차지한 한국 헌혈의집과 다르게, 200평 규모의 단독 건물이 많다. 혈액센터 지부마다 의사가 주재하며 소규모 교육을 진행한다. 가나가와현 혈액센터는 2015년 만화와 잡지 등 900여 권을 비치하고 북카페 분위기로 꾸미기도 했다. 혈액만을 목적으로 공간을 구성한 한국과 대조된다.

보건복지부 혈액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헌혈의집을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며 “한국도 헌혈의집이 전국으로 퍼져 있고 헌혈 교육을 실시할 전문 인력을 이미 갖춰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글싣는 순서
① 혈액대란에 우는 환자들
② 서바이벌게임 된 지정헌혈
③ 미봉의 연속, 헌혈정책

박혜연·김미루·양형욱·이승주(MBC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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