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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된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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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메, 백악(白岳)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에 올랐다. 청와대 옆으로 난 새 길을 통해서다. 새 대통령의 취임에 맞춰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북악의 남쪽 등산로도 함께 열렸다.
처음 열린 청와대 뒷길엔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오르막이 만만치 않음에도 새 길을 걷는다는 감격에 한껏 상기된 낯빛들이다. 삼엄한 경계태세를 보여주는 철책과 초소들이 길옆으로 이어졌다. 북악을 걷는 길 시선은 자꾸 담장 너머 청와대로 향한다.
동쪽으로 너른 시야가 열리는 곳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심은 은행나무를 만났다. 얼마 안 가 만나는 쉼터, 백악정 좌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심은 느티나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심은 서어나무가 제법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청와대 전망대에 오르니 시원하게 펼쳐진 서울이 발 아래다. 북악을 타고 내려온 싱그러운 초록은 청와대를 지나 칠궁, 경복궁까지 넓게 이어졌다. 광화문 너머엔 반듯한 큰길과 빌딩의 무리가 어우러졌다. 서울을 감싸 안은 풍경은 마냥 편안하기만 했다. 누가 이곳을 나쁜 풍수의 땅이라 했을까.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 모습이다. 풍경에 무슨 죄가 있다고, 그저 들어가 살았던 사람들의 문제였거늘.
세상 모든 권력이 응축돼 있던 청와대가 이젠 기억만 남은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덩그러니 박제가 되어버린 청와대.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이었던 금단의 땅이 너무 급작스럽게 열려서인지 해방감보단 허망함이 먼저 다가온다. 껍데기만 남은 청기와 처마선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용산에 대통령실을 연 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만큼이나 경남 양산 평산마을로 내려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일상에서도 여러 소식들이 전해진다.
대통령이 퇴임 직후 지역으로 낙향한 건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문 전 대통령의 귀향길에선 자연스레 14년 전 노 전 대통령의 귀향이 오버랩된다. 당시 봉하마을에는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다. 농군의 삶을 살겠다고 내려간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았다. 노 전 대통령은 친환경 농업, 숲 가꾸기, 화포천 살리기 등에 전력을 기울였고,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했다. 그는 자유스러워 보였지만 봉하에서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넘쳐나는 방문객과 퇴임 이후 더 높아지는 인기가 후임 정권에서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리고 이후 불행한 사태가 이어졌다.
친구이자 동지였던 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 전 대통령이다. 지난 9일 청와대를 걸어 나온 문 전 대통령은 “잊힌 삶”이 되길 원했다. 마지막까지 국정수행 지지율이 40%를 훌쩍 넘었고, 많은 박수를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지만 정권을 내주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퇴임 직후 문재인 정부의 비리의혹 규명을 요구하는 고발이 잇따르고 있다. 평산마을에도 1인 시위자나 반대단체들이 몰려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지르고 확성기를 틀어댄다. 평산마을 주민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기대하고 있지만, 세상이 그가 노을처럼 조용히 살도록 그냥 놔둘지 모를 일이다.
새 대통령 취임식 후 문 전 대통령은 “해방됐습니다. 이제 자유인입니다”라고 말한 뒤 귀향 열차에 올랐다. 그의 ‘해방일지’는 이제 시작됐지만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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