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전쟁의 공포에 카메라로 맞선 저널리스트

입력
2022.05.16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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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izia Battaglia(1935.3.5~ 2022.4.13)

이탈리아 여성 포토저널리스트 레티치아 바탈리아는 1970, 80년대 '마피아 2차전쟁' 시기의 끔찍한 테러와 보복테러 현장과 시칠리아 팔레르모 시민들이 겪은 공포와 비참을, 목숨을 내놓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증언했다. 그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기자로서의 의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60만여 컷의 사진을 '피의 아카이브'라 말했고, 마피아 소탕전에 가담한 한 검사는 '팔레르모의 영혼'이라 명명했다. antimafiaduemila.com

이탈리아 여성 포토저널리스트 레티치아 바탈리아는 1970, 80년대 '마피아 2차전쟁' 시기의 끔찍한 테러와 보복테러 현장과 시칠리아 팔레르모 시민들이 겪은 공포와 비참을, 목숨을 내놓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증언했다. 그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기자로서의 의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60만여 컷의 사진을 '피의 아카이브'라 말했고, 마피아 소탕전에 가담한 한 검사는 '팔레르모의 영혼'이라 명명했다. antimafiaduemila.com

국가 폭력은, 난폭한 권력일수록 사적 폭력을 응징하는 데 가차없다. 1960, 70년대 박정희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문신한 '덩치'들을 보이는 족족 삼청교육대로 몰아 넣었듯이, 이탈리아 마피아의 목덜미를 가장 효율적으로 틀어쥔 집단도 파시즘 정권이었다. 무솔리니 정권은 군대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마피아를 단속했고, 시칠리아 조직은 와해되다시피 했다. 투옥되지 않은 잔당은 미국 등지로 피신했다. 종전 후 연합군은 파시스트 정권의 정치범과 양심수들을 대거 석방했고, 그 와중에 마피아들도 자유를 찾았다.

국가 폭력이 사적 폭력보다 더 끔찍하게 경계한 건 '빨갱이'였고, 전후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마피아는 약동의 봄을 맞이했다. 에드거 후버 체제의 FBI가 마피아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며 뒤에선 그들을 노동운동권 등 좌파 탄압에 활용한 것처럼, 전후 집권한 이탈리아 우파 기독교민주당은 가톨릭교회와 동조해 마피아를 좌파 탄압의 행동대로 부렸다. 정치권과 결탁한 마피아는 시장 자릿세에서부터 전후 활황기의 건설업, 금융, 마약 밀무역에 이르는 거대한 검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차라리 무솔리니 때가 나았다'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푸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이권을 둘러싼 마피아 '전쟁'이 60년대와 80년대 크게 두 차례 벌어졌다. 전자는 북미 헤로인 공급 독점권을 두고 이탈리아 마피아들(그레코 vs. 라 바르베라 패밀리)이 벌인 거였고, 후자는 미국 마피아들을 아우르고 '대부'가 된 코를레오네 패밀리가 본거지 시칠리아(팔레르모) 마피아와 벌인 전쟁이었다. '거대한 마피아 전쟁(The Great Mafia War)'이라고도 불리는 2차 전쟁의 잔혹함은 규모와 기간, 양상 등 모든 면에서 전자를 압도했다.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를 주 무대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말까지 이어진 테러와 보복테러로 쌍방 조직원뿐 아니라, 검찰-경찰, 판사, 군인, 시민들까지 연평균 200여 명이 살해됐고, 조직원 4,000여 명이 검거됐다. 전후 좌우파 이념 테러에다 마피아 전쟁의 공포까지 견뎌야 했던 이탈리아 시민들은, 납덩이를 삼킨 듯 숨막히던 그 시절을 '안니 디 피옴보(Anni di piombo)' 즉 '납의 시대'라 불렀다.

그 2차 전쟁의 살육- 공포의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증언한 여성 포토저널리스트가 있었다. 이탈리아 최초 여성 사진기자 중 한 명인 레티치아 바탈리아(Letizia Battaglia, 1935.3.5~ 2022.4.13)였다. 그는 라이카 카메라를 목에 걸고 베스파 스쿠터로 팔레르모 시가지 골목들을 누비며 마피아 테러 현장을 촬영했고, 체포-연행되는 조직원들에게도 부라리는 눈빛과 뱉는 침까지 맞아가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90년대 중반까지 그렇게 찍은 60만여 컷의 사진을 그는 '피의 기록 보관소(archive of blood)'라 불렀고, 그 중 일부는 마피아와 결탁한 부패 정치인의 기소 증거로도 쓰였다.
바탈리아는 테러와 살인으로 찢기고 터진 시신들과 마피아 횡포에 짓눌린 서민, 특히 여성들의 가난과 비참을 기록한 사진들을 마피아의 뿌리가 뻗어나온 코를레오네 광장과 주무대 팔레르모 거리에 전시했다. 그의 사진들은, 처음엔 보복 두려움 때문에 눈길조차 못 주던 시민들을 자극해 분노와 용기를 응집시켰고, 80년대 중반 '팔레르모의 봄'이라 불리는 대반격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바탈리아는 "나도 물론 두려웠지만(...) 멈추지 않는 것,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나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80년대 마피아 소탕작전에 가담했던 한 검사(Pietro Grasso)의 말처럼, 그가 렌즈로 포착한 건 '팔레르모의 영혼'이었다. 근 반세기를 마피아 및 부패 정치와 더불어 살며 팔레르모 시민들이 겪었던, 아니 바탈리아 자신이 가장 먼저 감당해야 했던 공포와 비참, 분노의 영혼. 레티치아 바탈리아가 별세했다. 향년 87세.

1987년 1월의 바탈리아와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프랑코 체킨. 둘은 1974년 팔레르모 좌파 일간지에 입사, 사진기자로 프리랜스 기자로 일하며 숱한 마피아 특종 사진을 남겼다. 얼마 뒤 체킨은 세계적인 보도사진 작가그룹인 '매그넘 포토스'에 가담하며 이탈리아를 떠났다. 위키피디아.

1987년 1월의 바탈리아와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프랑코 체킨. 둘은 1974년 팔레르모 좌파 일간지에 입사, 사진기자로 프리랜스 기자로 일하며 숱한 마피아 특종 사진을 남겼다. 얼마 뒤 체킨은 세계적인 보도사진 작가그룹인 '매그넘 포토스'에 가담하며 이탈리아를 떠났다. 위키피디아.

바탈리아는 1935년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에서 가부장적인 목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전쟁 중에도 별 그늘 없이 말괄량이로 자라난 그는 어느 날 거리에서 벗은 아랫도리를 펼쳐 보인 한 남자(속칭 '바바리맨')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그날부터 딸의 바깥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고, 억압을 참다 못한 바탈리아는 만 16세에 아예 가출해 학교까지 중퇴하고 한 나이 든 남자(Ignazio Stagnitta)와 결혼을 감행해 버렸다. 이후 만 20년간 그는 딸 셋을 낳고 주부로 지내다 71년 이혼, 기자가 되기 위해 밀라노로 이주했다. 거기서 훗날 매그넘 그룹서 활약한 좌파 포토저널리스트 프랑코 체킨(Franco Zecchin, 1953~)을 만나 연인이 됐고, 74년 함께 고향 팔레르모로 돌아와 좌파 일간지 '로라(l'Ora)'에 입사했다.
바탈리아가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쥔 게, 만 39세였던 그 때부터였다. 그는 "사진기만 손에 쥐면 온 세상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에도 마피아는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바탈리아-체킨 커플은 불법 무전기로 24시간 경찰 무전을 도청하며 때로는 경찰보다 먼저 범죄 현장에 도착하곤 했다. 바탈리아는 "당시 우리는 밤낮없이 단단히 챙겨 입고 언제든 달려나갈 태세를 갖추고 지냈다"고 말했다.
하루하루가 살벌했다.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알 수 없었다. 밤에 무사히 귀가할 수 있을지 모른 채 아침에 집을 나서던 때였고, 언제든 마피아 손에 목이 잘릴 수 있었다." 법정을 취재하던 그에게 피고석의 한 마피아 조직원이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고는 '네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야'라고 입술로 말한 적도 있었고, '팔레르모를 영원히 떠나라. 사형선고는 이미 내려졌다"는 익명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바탈리아는 주눅들지 않았고, 마피아 장례식장에서 잔기침으로 셔터 소리를 감춰가며 참석자들을 촬영하기도 했다. "경찰이 마피아를 검거할 땐 얼굴에 침을 맞을 각오까지 하면서 수갑 찬 그들에게 최대한 다가서곤 했다. 그들이 내 눈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게 마피아에게 도전하는 내 방식이었다."
1993년 팔레르모 검찰은 거물 정치인 줄리오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 1919~2013)를 기소하며 바탈리아의 사진을 결정적 증거물로 썼다. 7개 정부를 거치며 세 차례나 이탈리아 수상을 지낸 안드레오티가 일면식도 없다고 거듭 주장했던 거물 마피아와 한 장례식장에서 다정하게 담소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검찰은 마피아에게 이권을 넘겨주고 재판에 간여한 혐의로 안드레오티에게 징역 15년형을 구형했으나, 그는 99년 무죄로 풀려났다.

"나는 낙관주의자다. 그래야 한다.
젊은이들에겐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치가 오직 증오만 보여주더라도
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레티치아 바탈리아, 2017년 가디언 인터뷰.


바탈리아는 고교 졸업장도 없고 사진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사진기자였다. 핵물리학 석사 학력에 유럽 주류 포토저널리스트들과 더불어 활동해온 체킨과 사뭇 다른 처지였다. 더구나 여자였다. "내 사진을 보고 좋다고 격려해준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전원 남성인) 사진기자 모임에 초대받은 적도 없었다. 물론 나도 신경쓰지 않았다."
체킨은 마피아 보도사진들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유럽과 북미 순회 전시를 다니곤 했고, 88년 매그넘 에이전시에 합류하며 이탈리아를 떠났다. 바탈리아는 혼자 시칠리아 마피아 전장을 끝까지 지켰고, 하루에만 서너 차례 살해 현장을 취재한 적도 있었다.

바탈리아가 수많은 마피아 보스들의 고향인 코를레오네 중앙광장에서, 주도 팔레르모 거리에서, 참혹한 시신 등 테러 현장 사진들을 전시한 건 2차전쟁이 막 달아오르던 1979년이었다. 시민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아예 멀찍이 돌아가곤 했다. 마피아의 저 악명높은 '오메르타(Omerta)', 즉 마피아의 일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침묵의 계율 때문이었다.

1980년 1월 시칠리아 주지사 피에르산티 마타렐라(Piersanti Mattarella)가 승용차에 탄 채 마피아의 기관총 세례에 숨진 현장 사진도 그의 특종이었다. 마타렐라의 시신을 끌어내던 당시 법관이던 그의 동생 세르조(Sergio Mattarella, 1941~)는 저 사건 직후 마피아와의 전쟁을 약속하며 법복을 벗고 정계에 입문, 2015년 대선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현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다. 당시 희생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셔터를 눌렀다는 바탈리아는 훗날 그 순간을 "희망의 순간'이었다고, 세르조의 결단과 용기의 순간이었다고 흐뭇해했다.

1980년 시칠리아 주지사 피에르산티 마타렐라의 피습 현장. 형인 피에르산티의 시신을 옮기는, 사진 중앙의 안경 쓴 이가 이탈리아 현 대통령인 세르조 마타렐라다. 레티치아 바탈리아 사진.

1980년 시칠리아 주지사 피에르산티 마타렐라의 피습 현장. 형인 피에르산티의 시신을 옮기는, 사진 중앙의 안경 쓴 이가 이탈리아 현 대통령인 세르조 마타렐라다. 레티치아 바탈리아 사진.

2차전쟁이 가열되면서 무고한 시민과 검찰-경찰, 법관들의 희생도 늘어갔고, 시민들의 분노도 점증했다. 80년대 중반 확산된 반 마피아 정서와 반격의 서막을 '팔레르모의 봄(Spring in Palermo)'이라 부른다. 그 분노와 용기의 중심에 팔레르모 시장을 수 차례 역임한 현 시장 레오루카 오를란도(Leoluca Orlando, 1947~)와 바탈리아가 있었다.
바탈리아는 시칠리아 갑부들의 휘황찬란한 사치도, 잠든 사이 쥐에게 손가락을 뜯긴 갓난애까지 세 아이를 키우며 노동에 지친 한 여성의 가난도 촬영했다. 얼굴에 스타킹 복면을 쓴 채 장난감 권총으로 행인을 겨누는 소년, 테러에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여인도 있다. 팔에 축구공을 끼고 카메라 렌즈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빈민가 소녀의 사진을 가리키며 바탈리아는 "소녀의 눈빛에서 내가 본 건 미래를 향한 꿈"이었다고, 2016년 프랑코 마레스코(Franco Maresco)가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그는 한참 뒤 성인이 됐을 그 소녀의 근황이 궁금해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그녀의 삶이 잘 풀렸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장난감 권총으로 마피아 놀이에 한창인 팔레르모 소년(1982), 축구공을 든 팔레르모의 한 소녀(1980), 카놀리를 사러 나갔다가 마피아에 의해 살해된 남편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여인.(왼쪽 위사진부터 시계방향) 레티치아 바탈리아 사진.

장난감 권총으로 마피아 놀이에 한창인 팔레르모 소년(1982), 축구공을 든 팔레르모의 한 소녀(1980), 카놀리를 사러 나갔다가 마피아에 의해 살해된 남편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여인.(왼쪽 위사진부터 시계방향) 레티치아 바탈리아 사진.

그는 흑백 사진을 고집했다. "시체를 찍을 때는 흑백 필름이 섬세함과 경건함을 담기에 더 낫"기 때문이었다. 그는 "(흑백)사진에 깃드는 침묵, 그 침묵이 내겐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9년 그를 인터뷰한 가디언 기자가 그(의 사진에서)에게서 로맨틱한 면이 엿보인다고 말하자 그는 매섭게 노려보며 "내게 사진은 결코 로맨틱한 뭔가가 아니다. 그렇게 진부하지 않다. 정말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치열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좋은 사진가는 사진 속에 어떻게든 자신을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은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폭력과 가난은 지금도 여전하고, 어리석은 전쟁에 아이들은 여전히 희생되고 있다"고도 했다. 그의 절친이자 희망과 변화의 상징이던 반(反)마피아 검사 조반니 팔코네와 파올로 보르셀리노가 잇달아 폭탄테러에 희생된 뒤에는 절망에 빠져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도 했다.

그가 녹색당 후보로 지자체 선거에 출마, 팔레르모 시의회(1985~91)와 시칠리아 주의회(91~96)에서 일한 것도, 어쩌면 사진에 대한 회의와 환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019년 한 매체 인터뷰에서 그는 정치인으로 산 10년을 "내 생애 최악의, 가장 수치스러운 기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많은 급여를 받았다. 모든 게 (의회)바깥에서 결정됐고, (결정이 이뤄지는)거기에도 마피아가 있었다."

말년의 그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10세 아이들, 특히 소녀들을 만나러 다녔다. "10살은 순수의 나이이고, 내게 순수함은 아름다움의 동의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말했다. "내가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겐 희망이 필요하고, 내가 그걸 줘야 하기 때문에, (...) 정치가 오직 증오만 보여주더라도 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1985년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 인권 사진 기금' 수상자로 선정되며 주류 국제무대에서 처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한 적 없다고 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전장같은 거리가 아니라 이탈리아 국립현대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전시됐고, 그의 삶과 작업을 소개하는 책과 TV 미니시리즈 'Just for Passion'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오를란도 팔레르모 시장은 고인이 된 오랜 동지이자 친구를 기려, 2017년 개관한 사진 전문 미술관 '국제사진센터(Centro Internazionale di Fotografia)'을 '바탈리아 국제사진센터'로 개칭한다고 밝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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