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날 추앙해요" 시대의 '밈'으로... 공정과 닮은 아우성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으론 안 돼요, 날 추앙해요."
지난달 주말,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김지원)이 구씨(손석구)에게 한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경전에나 나올 법한 추앙(推仰)이라니. 돌이켜보니, 이 성스럽고 묵직한 단어를 일상에선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구씨도 놀랐는지 드라마에서 그는 휴대폰으로 그 단어를 검색한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이 사전적 의미처럼 추앙은 '예수를 추앙하다'라고 쓸 때나 어울릴 법한 단어였다. 추앙 에피소드가 담긴 2회가 끝난 직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영어 자막으로 돌려보니 "날 추앙해요"는 나를 숭배하라는 뜻의 '워십 미(Worship Me)'로 번역돼 있었다. SNS엔 아뿔싸, '세상에, 난 추행으로 들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폭력의 언어를 떠올리며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TV 주말 드라마에서 나온 추앙은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멀고 먼 단어였다. 2회가 방송된 지난달 10일 직후까지의 분위기는 그랬다.
추앙, 'n포 세대'의 열망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추앙이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를 중심으로 유행어로 떠오르고 있다. 누리꾼은 SNS 명패를 '추앙'으로 하나둘씩 바꿔 달았고, 온라인엔 '추앙'을 해시태그로 단 소박한 일상의 글이 쏟아졌다. 숭배를 통해 내 주변을 지키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다.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이후 가속화된 경제적 양극화에 거리두기로 인한 심리적 고립감까지 겹친 게 이 기이한 유행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n포 세대'가 상대적 박탈감이 극에 달해 참다못해 '공정'이란 옐로 카드를 꺼냈다면, 이번엔 산산이 부서진 존재감을 추앙이란 화두로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집단적 열망을 분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추앙이 '시대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 관심을 보여주듯 '나의 해방일지'는 이달 첫째 주 드라마 화제성 1위(2일~8일, 굿데이터코퍼레이션 기준)를, 지난달 마지막 주(4월 25일~29일·키노라이츠 기준)엔 OTT 통합 콘텐츠 인기 1위를 차지했다.
직장·연인·집에서 무시받는 '미생'
TV 밖으로 추앙을 쏘아 올린 드라마 속 미정은 '사막' 같다.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마음에 희망은 한 포기도 자라지 않고, 생기라곤 없다. 미정은 직장에서 상사의 '감(感)' 하나에 영혼이 탈곡되는 말단 직원으로, 경기의 외딴 시골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하루에 네 시간을 길 위에 쏟아 마음과 몸은 늘 방전돼 있다. 게다가 전 남자친구가 갚지 못한 대출금을 월급을 털어 대신 갚고 있으며, 집에선 맏언니가 안 하는 밭일을 떠안아야 하는 막내이자 여성이다. 미정은 곳곳에서 존중받지 못했고 그래서 무기력하다. 세상의 불행을 모두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한 발짝만 떨어져 보면 수많은 '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직장은 물론 집, 심지어 이성 관계에서도 자신을 감추고 지워야 하는 권력 밖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숨죽이며 살았던 미정은 어느 날 불쑥 욕망을 드러낸다. 서울에서 도피해 낮에는 대파를 뽑고 싱크대를 만들며, 밤에는 술에 젖어 사는 구씨를 찾아가 이렇게 도발한다.
"왜 매일 술 마셔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X, 개새X.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왜 사랑도 존경도 아닌 추앙이어야만 할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에서 사랑으로 안 된다는 말은 결국 세상에 가짜 사랑이 넘치고 있다는 역설"이라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바닥난 시대에 존경이란 단어도 '리스펙'이란 말로 너무 가벼이 다뤄지면서 비일상적인 언어인 추앙이란 단어를 작가(박해영)가 끄집어냈고, 시청자들이 그 단어를 포착해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을'들이 서로의 신도 자처"
미정이 추앙을 요구한 상대는 그녀와 똑같이 마을에서 은근히 무시당했던 또 다른 '을', 구씨다. 윤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불평등 구조를 전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그래서 TV 밖 시청자도 서로에 대한 신도를 자처하며 숭배받는 자와 숭배하는 자 간의 수평적 역할 놀이로 서로의 심리적 상처를 상쇄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추앙에 대한 호명은 공정 신드롬의 연장선으로도 읽힌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한동안 우리를 억누른 박탈감은 그 자체를 형상화한 'n포 세대'나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으로 표현됐다"며 "하지만 그 박탈감이 커지고, 팬데믹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공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처럼 추앙도 소외된 개인을 어떻게든 주목하고 띄워달라는 메시지 일환"이라고 해석했다.
부모에게조차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추앙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학생 한혜지(22)씨는 "취업 등으로 스트레스가 커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는데, 내가 엄마한테 바라는 게 이런 무조건적인 지지, 추앙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 공감됐다"고 말했다. 대학생 심희보(20)씨는 "주변을 보면 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뿐인데 '내가 중간은 갈 수 있을까'란 생각을 많이 한다"며 "추앙이라는 게 아직 온전하지 않은 내게 꼭 필요해 보였다"고 공감했다.
'MBTI 열풍'과 추앙이 보여주는 것
팬데믹은 'n포 세대'에 큰 타격을 줬다. 취업 문은 더욱 좁아졌고, 2년 넘게 지속된 거리두기로 대인 관계는 얇아졌다. '코로나 학번'들은 MT를 가지 못했고, 온라인에서 친구와 '접속'했다. 결핍은 더욱 깊어졌고, 자존감은 메말랐다. 맹목적인 존중 즉 추앙이 필요해진 배경이다. 추앙에 대한 집단적 열망으로 드러난 소멸하는 존재감에 대한 깊은 불안은 MBTI(성격유형검사) 유행과 함께 표출되고 있다. '트렌드 모니터' 시리즈를 낸 윤덕환 심리학 박사는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감은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확인된다"며 "코로나 1년 차엔 한국의 억압적 인간관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리두기가 해방감을 줬다면, 2, 3년 차엔 관계의 결핍을 느끼면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사라지고, 결국 MBTI로 나를 찾고 서로를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추앙의 징후는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윤여정, Mnet 오디션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청춘의 성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의 인기가 대표적이다. 성 평론가는 "윤여정에 대한 환호엔 한부모 가정을 지킨 질곡의 삶을 살아낸 여성 그리고 노배우의 극복 서사가 있고, '스우파'는 무대에서 늘 조명받지 못했던 댄서 그리고 여성에 대한 전적인 지지였다"며 "그렇게 자존감이 추락하고 기반이 없는 약자에 대한 추앙이 대중문화에도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고 바라봤다.
'3분 양치'를 지키는 이유... 추앙의 실천 '리추얼 라이프'
대중문화에서 이렇게 추앙이 소비됐다면, '리추얼(Ritual) 라이프'는 일상 속 추앙의 실천이다.
리추얼은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를 일컫는데, 습관과는 개념이 좀 다르다. 습관이 익숙한 행동이라면, 리추얼은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이다. 구독자 21만 명을 거느린 인기 유튜버이자 변호사인 김유진씨는 매일 오전 4시 30분에 일어난다. 김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머릿속을 정리했던 그 새벽은 지친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 돼 줬다"고 했다. 새벽에 자신을 채운 김씨는 오전 8시에 친구와 만나 아침밥을 먹으며 관계를 잇는다. 코로나로 한때 오후 9시면 식당 등이 문을 닫았기에 '아침 만남'은 탈출구가 됐다. "잠시 멈춰 삶을 가다듬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 그게 바로 리추얼이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서점가엔 김씨가 지난해 연말 낸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를 비롯해 미국 하버드 신학대 연구원이 쓴 '리추얼의 힘' 등 리추얼 라이프 지침서가 잇따라 출간됐다. 코로나란 불가항력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개인은 리추얼로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그렇게 최대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 안간힘을 쏟는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2022'에서 스스로 일상을 지키고자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는 '루틴이'를 유행의 지표로 꼽았다. 3분 양치하기 같이 소소한 루틴을 지켜나가며, 나만의 성공 스토리를 쌓는 식이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코로나로 흔들리는 일상에서 사소하지만 저만의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스스로 존중받고, 강하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심리"라고 평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