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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년 전 5월, 고향을 절규했던 애니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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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빛이 차지해 버린 거리를 슬로모션으로 느릿느릿 걷는 사람들. 다들 어딘가 숨어 평화로운 낮잠이라도 자는지 한낮의 메리다 시내는 마냥 한적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시원한 밤바람이 태양의 열기를 거두어가면 흔들거리는 불빛을 따라 어디선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음악과 춤. 카바레나 디스코텍 같은 건 필요도 없이 광장 주변 거리를 다 막고 길바닥을 열심히 비벼대며 살사를 추는 이들이 가득했다. 마법사가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의 마야피라미드처럼, 나 역시 하룻밤 사이에 메리다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거리에는 다시 나른한 정오가 흘러가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여행자의 강박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시원한 에어컨이 필요했던 걸까. 별 생각 없이 들어간 시립박물관 구석에서 태극기가 선명하게 박힌 사진 한 장을 만났다. 이곳으로 이주해 힘겨운 노역생활을 했던 '애니깽'의 흔적이었다.
1905년 제물포 항을 떠난 배는 한 달을 넘기고서야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했다. 처음 내린 항구가 끝도 아니라 다시 기차에 실려 내륙을 통과해 반대편 멕시코만까지, 거기에서 또 배를 타고 메리다 근처 항구까지. 그 길에서 3명은 목숨을 잃었고 1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으며, 그렇게 1,031명의 조선인이 처음으로 멕시코 땅을 밟았다. 117년 전 5월의 이야기다.
넉넉히 일당을 쳐주겠다는 광고에 속아서 떠난 이들을 기다린 건 용설란 농장의 노예노동이었다. 당장 상투부터 잘린 채 농장에 갇혀서 사람만 한 선인장을 수천 개씩 베고 다듬어 선박용 밧줄을 만들었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질이 쏟아지고 용의 발톱처럼 커다란 가시에 쿡쿡 찔리다 보니 작업복은 피투성이였다. 1원30전 준다던 일당은 35전으로 줄어 있었고 그마저 식비로 20전을 내야 했다. 그 용설란이 스페인어로 에네켄(Henequén), 우리식 발음이던 '애니깽'은 곧 그들을 부르는 말이 됐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도 계약한 4년만 버텨보자 이를 악물었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사라진 조선이라는 나라. 조선인 여권으로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난민신세였다.
메리다와 사랑에 빠졌던 광장에서 딱 5블록 거리, 지금은 사라졌지만 '제물포'라는 술집이 있었다. 힘겨운 이민생활에 지친 이가 술에 취하면 "제물포, 제물포…" 하면서 절규를 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 주인이 술집이름을 붙였단다. 제물포에서 그 배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는 가슴 치는 후회였을까, 꿈에도 돌아가고픈 고향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이었을까. 밤마다 울려 퍼지는 광장의 노랫소리가 그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이 모든 기억과 절규를 담고자 인천과 메리다는 2007년부터 자매도시가 되었고 이제 제물포술집이 있던 자리는 '제물포거리 El chemulpo'로 불린다.
박물관에서 그 사진을 만난 후 다시는 느린 낮과 흥겨운 밤, 뜨거운 태양이 만드는 여유의 순간만으로 메리다를 기억할 수 없었다. 지옥처럼 달궈진 공기에서 감도는 알 수 없는 냄새가 낯설었을 그들의 두려움이 떠오른다. 수박껍질로 '가짜 김치'를 담가 먹으면서도 독립자금을 보내고 독립군을 훈련시키며 다시 돌아갈 나라를 되찾고 싶어했던 평생의 소원이 떠오른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1,031명의 사람들, 우리 역사의 고단함이 이 먼 땅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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