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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시는 시로 새 이야기가 된다… 버스 운전사 패터슨처럼 [다시 본다,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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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1883-1963)는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을 통해 우리에게 친근해진 미국 시인이다. 소도시 패터슨에 살며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담담한 영화를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시가 있는 공간에 들어가려면 어디서 허락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우리를 향해 "모두에겐 시를 할 권리가 있다!"(니코 케이스 '누가 시를 읽는가'·봄날의책 발행)고 말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등단하거나 문학상 수상 경력이 없어도 우리가 충분히 문학을 사랑하고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자무시는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은 문학관을 영화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가령 패터슨이 한밤중에 코인 세탁소에서 만난 래퍼가 부르는 랩의 가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윌리엄스의 가장 유명한 시구다. 또한 폭포 앞 공원 벤치에서 패터슨이 일본인 관광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윌리엄스 시집의 한 구절을 옮겨놓은 것만 같다. "그에게 물어보았죠, 직업이 뭐죠?//그는 참을성 있게 웃었어요, 전형적인 미국식 질문./유럽에선 이렇게 묻겠죠, 무슨 일 하고 계세요?(…)내 직업이 뭐냐고요? 나는 귀를 기울여요. 떨어지는 물에."('일요일 공원에서')
윌리엄스는 영화 속의 패터슨처럼 전업 시인이 아니었다. 의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40년 동안 소아과와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면서 가난한 임산부들의 집에 왕진을 다녔고 3,000명이 넘는 아기들의 출산을 도왔다. 그는 시로 표현해야 할 특별한 경험이나 위대한 관념이 따로 있지 않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물이 시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먹으려고 남겨둔 자두를 먹어 치운 미안함, 섬망으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느끼는 의사로서의 자괴감, 골목에서 소년들과 함께 공을 차는 짧은 머리 소녀... 그가 접촉하는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그는 처방전 용지에 생각난 시구들을 급히 적을 때가 많았다. 따로 시를 쓸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얻은 강렬한 통찰을 바로 기록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도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회진 돌면서 혹은 가정 방문 진찰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워.(…)거긴 더 깊은 무언가가 분명 흐르고 있어. 모든 만남이 주는 힘 같은 것 말이지."(정은귀·사소하고 따뜻하고 분명한 '접촉' 재인용)
윌리엄스의 고향 러더퍼드 근처의 패터슨시는 이민자들이 많고 미국에서도 노동 쟁의가 극심한 공업 도시였다. 그곳에서 시인이 만난 현실은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폐수로 오염된 퍼세익강, 검진하러 간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로 들끓는 머리, 불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차. 이런 현실들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 그는 살고 사랑하는 일은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장미들의 특징이/살을 찢는 것이듯,//(…)사랑의 계절들이 말한다./살면서/들장미들을/그냥 놔두는 건 불가능하지.”('담쟁이 덩쿨 왕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살을 찢고 피 흘리게 만들지만 삶을 사랑하는 이는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인생에 박힌 가장 고통스러운 가시를 용감하게 만지며 자신만의 새 이야기를 써 나간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는 난민들과 상담하는 중에 그들에게 용기 있게 행동한 기억이 있는지 물었다. 모두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고 미국으로 온 피해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 한 젊은 여성은 군인들이 몰려왔을 때 자신이 여동생을 문 뒤로 밀어 넣어 동생이 강간당하지 않게 보호했다고 말했다. 이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대신 고결하다고 느끼게 된 것 같았다고 파이퍼는 전한다('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위고 발행). 새롭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이 여성은 자기 삶의 폐허 같던 장면에서 살아갈 용기와 싸울 힘을 얻은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갱신/심지어/어떤 시작, 그것이 여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이므로"('일요일 공원에서'). 시 쓰기를 통해 삶은 늘 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시인들이란 그렇게 믿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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