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기름의 재발견

입력
2022.05.11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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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강원 춘천의 유명한 구도심 번화가인 육미고개 정상 부근. 이 동네는 한때 도시재생사업으로 청년 가게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요즘 주춤하다. 상권이 활기를 많이 잃었다. 그래도 분전하는 식당 한 곳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길게 줄을 섰다. 고정관념을 깬 메뉴를 파는 양식당이다. 청년이 주인이고, 청년이 직원이다. 상호가 특이하다. '어쩌다 농부'. 메뉴도 이름처럼 특별한 게 있다. 들기름을 넣은 명란 스파게티다. 파슬리 대신 쪽파를 뿌렸다. 양식의 대명사인 파스타인데, 국수인 스파게티 딱 하나 말고는 외국산 재료가 들어가지 않는다. 이 가게를 유명하게 만든 메뉴다. 들기름 향이 고소하고, 명란이 부드럽게 입에 바르듯 퍼져 나간다.

요즘 들기름과 참기름을 다시 보는 열기가 높다. 이 두 기름은 한식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현대 음식의 발달은 기름을 자유롭게 쓰면서 본격화됐다. 기원전부터 오랫동안 기름은 가장 사치스러운 요리 재료였다. 황금에 비유되기도 했다. 로마와 그리스는 올리브유를 증산하면서 더 부유해지고, 음식문화가 풍성해졌다. 동물성 식용유의 대표격인 버터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다. 마음껏 버터를 써보는 게 서민의 소망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하는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인데, 이 케이크는 브리오슈라는 버터를 잔뜩 넣은 빵을 영어로 옮기면서 붙인 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유한 식용유 문화가 있었다. 참기름, 들기름은 기본이고 땅콩기름도 많이 썼다. 짜기 편한 재료들이다. 하지만 값싸고 양 많은 수입 콩기름이 시장을 장악한 1970년대부터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콩기름이 왕이 됐다. 지금도 '식용유'는 곧 콩기름을 의미하고 있다. 참기름, 들기름은 아주 귀했다. 기름 농사는 힘들고 나오는 양도 적다. 어머니들은 음식에 기름을 정말 아껴 넣었다.

미국 식용유 수입 사건 다음으로 우리나라 기름 역사에 큰 획은 그은 건 1990년대 한중 수교다. 기후나 풍토가 비슷한 중국으로부터 참기름, 들기름이 많이 수입되면서 우리 식탁도 듬뿍듬뿍 기름을 쓸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 기름의 가치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한살림 등의 소비조합 운동이 불을 지피면서부터다. 최근에는 젊은 요리사들과 생산자들이 전통적인 착유 방식 대신 고품질 기름을 내놓으면서 식용유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고급 올리브유에서 힌트를 얻은 저온 압착 방식이다. 기름이 진한 향을 내지 않는 대신, 산패를 대폭 줄이고 은근한 향을 강조한다. 들기름을 넣은 막국수가 대중적인 히트 상품이 되고 있다.

저온 압착 들기름이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건강에 특별하게 좋다는 발견 때문이다. 성인병을 예방하는 오메가3 등의 함유량이 아주 높다는 것이 알려졌다. 한때 올리브유가 동이 날 정도가 인기가 있었던 것도 바로 건강에 좋다는 소문 때문이었는데, 들기름이 올리브유보다 오메가3의 조성이 더 좋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그런데 이 좋은 기름의 수급이 좋으냐면 그렇지도 않다. 식용유가 되는 농사는 힘들다. 까다로운 작물이다. 농촌이 급격하게 노령화되면서 이런 힘든 농사는 기피한다. 흥미로운 건 그나마 들기름의 상승폭이 가파른 이유다. 바로 삼겹살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고기집의 팔수 채소인 깻잎 농사가 많아서 관련된 들기름도 더 많이 얻는다는 얘기다. 어쨌든 기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 같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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