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악마'를 심판대에 올리려면

입력
2022.05.0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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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시민들이 동남부 '최후 항전지' 마리우폴에 인도주의적 통로를 열 것을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시민들이 동남부 '최후 항전지' 마리우폴에 인도주의적 통로를 열 것을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살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2011년 겨울, 성범죄 관련 취재를 위해 한 성폭력상담소 상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되레 무시무시한 질문을 받았다. “음…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거요?” 단편적인 답변이 민망해지던 찰나, 휴대폰 너머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이 살인은 아니에요. 인간의 존엄을 빼앗아 영혼을 갉아먹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기는 것도 마찬가지죠. 성폭행을 ‘영혼에 대한 살인’이라 부르는 이유예요.”

10년도 더 지난 그날의 대화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 건 최근 받은 이메일 때문이다. 일주일 전 쓴 ‘러시아軍 천인공노할 성범죄에… 우크라에 응급피임약 보낸 유엔 자문기관’ 기사를 읽은 한 독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군에 유린당한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사연은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 사안을 너무 감성적, 자극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전시(戰時) 강간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졌고, 전쟁의 ‘부수적 피해(Collateral Effect)’다.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전쟁터에서는 개인의 영혼을 갈가리 찢는 성범죄가 유독 관대하다. 역사 속 숱한 분쟁의 한복판에서 많은 여성이, 때로는 남성들까지 저열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의 희생양이 됐다. 침략자들은 힘을 과시하고 상대 진영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리고 자국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점령지 주민들을 성적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성폭력이 전쟁의 도구로 사용된 셈이다. 30년 가까이 분쟁 지역을 취재해 온 영국 종군기자 크리스티나 램의 표현을 빌리면, 전시 성범죄는 그래서 ‘인류의 가장 값싼 무기’가 됐다.

인간성이 사라진 자리에 인권은 없다. 당장 러시아 병사가 한 살 배기 우크라이나 아기를 유린했다는 등의 입에 담기도 힘든 사례가 매일 쏟아진다. 그러나 ‘인간 탈을 쓴 짐승’들의 반인륜적 행위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고문과 학살, 무차별적인 파괴 앞에서 ‘안타깝지만 당장 어쩌지 못하는 일’로 밀리며 점차 부차적 문제로 취급된다.

세계는 이미 그 결과를 목도했다. 지난 30년간 지구 곳곳에서 전시 성폭력이 자행됐지만 단 한 건의 역사적 단죄도 없었다. 르완다 대학살(1994년) 당시 최소 25만 명,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 5만 명,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탄압(2016년) 때는 부족 여성의 52%가 성범죄 희생자가 됐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무력감은 불신을 먹고 자란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군의 성범죄 정황이 차고 넘치지만, 책임을 묻긴 어렵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전시 성범죄는 ‘어쩔 수 없는 전쟁의 부산물’로 남아선 안 된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앗아가고 종국에는 영혼마저 살해하는, 가장 악랄한 범죄의 하나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성(性)이 착취되고 더 많은 비명을 들어야 전쟁터의 악마들을 국제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있을까. 나의, 당신의, 우리의 관심과 압력이 필요하다. 세계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때 성폭력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전례는 이미 차고 넘치지 않나.

그래도 침묵을 지킬 거라면, 일본 문부성이 1962년 교과서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전시 성폭행 언급을 삭제하면서 내놓은 주장을 곱씹어보길 바란다. “여성들에 대한 폭력은 인간 역사의 모든 시대와 모든 전쟁터에서 일어났다. 특별히 일본군 관련해서 이야기해야 할 주제는 아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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