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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어쩌다 도서관에 숨어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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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삼 학년이 무슨 그림책이야. 글자 많은 책 읽어야지."
이 책의 주인공 아연이의 엄마는 방 하나짜리 월셋집으로 이사하면서 그림책들을 전부 팔았다. 아연이는 어려워진 집안 형편을 엄마가 쭈뼛거리며 설명할 때 "그럼 우리 집, 사기당한 거네" 하고 불쑥 말할 정도로 어휘력이 풍부한데, 어른들이 흔히 '아기들이나 보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책을 여전히 좋아한다. 나중에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질 정도로. 그러나 자기 방도 없어지고 좋아하는 책도 없어진 아연이의 저녁 시간은 텔레비전과 유튜브 시청으로 멍하니 채워질 뿐이다. '투잡'을 뛰는 엄마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을 시작하고 밤 아홉 시, 아니 그보다 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쓰러질 듯 귀가한다.
가을 학기에 갑자기 전학을 간 아연이는 쉽사리 친구들을 사귀지 못한다. 혹시나 아이들이 '월세 거지'라고 할까 봐 가슴이 얼어붙고, 아빠와 따로 사는 것도 들킬까 봐 무섭다. 정말로 그런 말을 하면서 무시하는 아이들이 있는 건 아니고 담임 선생님도 아빠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지만, 혐오의 언어는 꼭 면전에서 직접 들어야만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아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담임 선생님과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아연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는 하지만,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말에는 "혹시 글자 많은 책은 읽기가 힘드니?" “삼 학년인데 아직 그림책을 봐?"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래도 학교 도서관에는 볼 만한 그림책이 많았고, 사서 선생님은 아연이네 아파트 단지 안에 작은 도서관이 있고 거기에 그림책이 많다는 사실까지 알려준다. 아연이는 비로소 이사 온 동네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주애령 작가는 빈곤 가정의 어린이가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작품 속에 세심하게 배치했다. 동네 어른들이 스쳐 지나가듯 나누는 대화에서도,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지나가는 아이들 속에서도, 친절함과 다정함을 담은 담임 선생님의 눈빛에서도 아연이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밤늦게 퇴근할 때까지 3중으로 문을 잠근 채 불안한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 아연이와 엄마는 "밥 먹었어?"라는 인사를 나누지만, 둘 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제대로 챙겨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작은 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된 아연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그곳을 찾아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그림책에 빠져든다. 관장님 어깨너머로 현관 비밀번호를 보고 외운 뒤로는 도서관이 문을 닫는 날에도, 엄마가 늦는 날에도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을 마시면서 책을 본다. 그리고 그곳이 "내 방"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도서관 같은 공적 공간이 사적 공간인 집보다 오히려 아늑하고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얀 밤의 고양이'는 작년 여름 웹진 '비유'에 단편 동화로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글로 처음 만난 때가 분명 작년 8월의 무더위 속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겨울에 읽었던 것으로 착각했을 만큼 도서관 안의 차갑고 시린 공기가 단정한 문장들을 통해 생생하게 와닿았다. 글로만 읽어도 시각적, 촉각적 상상력을 한껏 북돋우던 '하얀 밤의 고양이'는 그림책으로 출간되면서 그 의미가 한층 풍부해졌다. 김유진 그림작가는 아연이가 어떤 그림책을 읽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글이 미처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더 멀리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내다 팔려고 묶어 놓은 책무더기 사이에서는 전미화 그림책 '달 밝은 밤'이 보이고, 학교 도서관에서 정신없이 책을 읽을 때는 고정순 그림책 '엄마, 언제 와'가 저만치 놓여 있다. 작은 도서관에서 빙긋이 웃으며 읽고 있는 그림책은 윌리엄 스타이그의 '용감한 아이린'이다.
엄마가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내면 항상 작은 도서관으로 향했던 아연이는 엄청난 폭설로 인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도서관에 며칠째 머물게 되는데, 작품 후반부에서는 현실인 듯 환상인 듯 눈부시게 하얀 고양이를 만나 새끼들을 함께 돌보며 지낸다. 먹을 거라곤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뿐이니 이러다가 큰일 나면 어떡하나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지만, 거센 눈폭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던 '용감한 아이린'의 주인공처럼 아연이도 결국 혼자 힘으로 일어나 도서관 밖으로 나온다.
아연이는 '이젠 혼자 있어도 괜찮아'라고 중얼거리지만, 사실 여태까지도 혼자 힘으로 너무 잘 버텨 왔다. 아니, 아연이를 지탱해주었던 힘은 작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얀 고양이 가족 덕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거실 한 편을 개방하거나 작은 사무실을 임대해 운영하기 시작했던 작은 도서관은 갈 곳 없는 작은 존재들이 몸과 마음을 기대고 쉬어 가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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