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무기에서 사용무기로...제3의 핵시대 도래

입력
2022.05.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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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달 14일 조지아주 애틀랜타 조지아텍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번스 국장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이에 대해 경고했다. AP 연합뉴스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달 14일 조지아주 애틀랜타 조지아텍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번스 국장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이에 대해 경고했다. AP 연합뉴스

핵무기는 사용하지 않고도 사용할 방법이 많은 무기다. ‘선언적 사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상대에겐 존립의 위협이 된다. 그래서 냉전시기 핵무기는 의사소통과 협상의 목적으로 사용됐다. 베를린 봉쇄 때 미국은 유럽에 7,000기 이상 핵폭탄을 배치하고 전 세계적인 폭격기 훈련을 실시했다. 베를린 공수를 소련이 막을 경우 핵을 실은 폭격기들이 새까맣게 몰려갈 판이었다.

한국전쟁 때 정전협정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핵무기 발사가 가능한 롱톰 원자포 배치를 지시했다. 언론에는 롱톰이 핵폭탄을 발사하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가상 사진이 배포됐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케네디 미 대통령은 핵 공격이 가능한 B-52 전략폭격기의 경계경보를 이용해 소련에 최후 결전 의지를 알렸다.

핵무기 위협을 활용한 것은 소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에즈운하 분쟁 때 프랑스와 영국에 점령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파리와 런던을 핵으로 타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핵의 선언적 위협이 실제적 사용과는 다르다고 해도 당사국은 위협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험은 현실적이다. 실제로 수에즈운하 위기 때 소련의 핵 위협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핵무장이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핵 전문가들은 그러나 핵무기 역할을 1기와 2기로 구분해 핵이 실질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우려한다. 제1 핵 시대는 냉전 시기인데 당시 핵은 미국과 소련 양국 대립을 안정시키는 질서의 무기로 기능했다. 핵 공격을 받아도 상대를 확실하게 보복 파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양측이 인정한 덕분이다. 이런 논리에서 핵의 사용은 곧 공멸을 의미하면서 긴장 속 평화가 유지됐다.

제2 핵 시대는 냉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핵의 역할을 감소시킨 시기다. 최근까지 포함한 이 시기는 핵의 망각시대로 불린다. 무엇보다 첨단무기로 세계를 압도한 미국은 이라크 이란 북한의 핵 확산 시도에 하이테크 무기와 미사일 방어체계로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핵 테러 공포까지 고조되면서 핵은 적을수록 좋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대상이 아닌 전술핵무기 등의 전력을 증강시키며 미국과의 격차를 좁혀 갔다. 결국 트럼프 정부에서 미국도 뒤늦게 중러 양국에 대항할 핵 부활 시동을 걸게 된다.

냉전 때는 핵 위기가 발생해도 핵 전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사실상 핵 독점이 가능했기 때문에 핵 방아쇠를 쥐고 있던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폴 브래큰 예일대 교수는 “오늘날 핵 전쟁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주요국의 핵 독점이 붕괴하면서 핵 전쟁을 막고 평화를 추구하던 자동 차단기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현재 핵무기는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함께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북한까지 9개국이 보유하고 있다. 더구나 핵 공격이 감지되면 즉시 보복 공격하는 미국 등의 ‘경보 즉시 발사(LOW)’ 같은 전략도 핵 무기 사용의 위험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러시아의 핵 사용 위협은 핵무기는 사용할 수 없는 절대무기란 인식을 바꿔 놓고 있다. 수킬로톤(kt)에 불과한 저위력 전술핵무기의 등장도 핵 사용의 군사 전략상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보수 성향의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3월 다카하시 스기오 일본방위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의 말을 인용해 “핵의 제한적인 사용이 현실화한 시대, 핵 사용을 준비하지 않으면 핵이 억지력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했다. 제3 핵 시대라고 불러야 할 시점이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전 의원은 “섣불리 일본 측 주장에 동조할 수 없으나 그런 시대가 출현한 것이라면 국내에도 전술핵 공유, 핵 무장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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