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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일본어 듣고 눈물 맺혔다는 '파친코' 재일교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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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반도 노부코(74)씨는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묘를 찾으러 부산으로 건너왔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김선자로,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으로 이주했다. 50년 만에 아들과 처음으로 고향 땅을 밟았는데, 그녀에게 돌아온 건 홀대였다. 아버지 묘를 찾기 위해 관공서를 찾았더니 공무원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녀의 '진짜 국적'을 되묻기만 한다. "할아버지 묘 좀 찾자는데, 이게 무슨!" 김씨의 아들 모자수가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옆에 앉은 어머니는 아들의 들뜬 오른손을 눌러 앉힌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속 선자(윤여정)와 그의 둘째 아들 모자수를 연기한 아라이 소지(47)의 모습이다. 그는 극에서 억양까지 날카롭게 벼려 한국어 대사를자연스럽게 내뱉는다. 한국말은 어떻게 배웠을까. 알고 보니 "연세어학당 한국어 말하기 대회 1등" 출신이란다.
"아직 많이 멀었어요, 하하하. 일본에선 한국말을 쓰지 않았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진 못했거든요. 배우 2년 차 때 한국으로 건너와 연세어학당을 다니면서 배웠죠. 6개월 동안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최근 본보와 서면으로 만난 아라이 소지의 얘기다.
재일교포 1세 할머니 얘기 오디션 테이프에
1975년 니가타현에서 태어난 그는 재일교포 3세다. 한국 이름은 박소희. '파친코' 속 가족의 삶과 그의 뿌리는 같다. 그런 박소희는 2017년 원작 소설이 출간됐을 때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와, 이건 내 얘기잖아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박소희는 이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하고 바로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원작 속 선자 같은 할머니의 얘기를 오디션 테이프에 담아 제작사에 보냈고,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박소희는 "이 역(모자수)을 맡게 된 건 절대적으로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소년이 일본에서 무술을 배운 이유
'파친코'엔 이민자의 설움과 한이 서려 있다. 극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일본인들은 우릴 바퀴벌레라 불렀지. 잘 생각해 봐, 그게 너한테 하는 소리니까." 박소희도 일본에서 차별을 겪었다. 한국 이름으로 일본 학교에 다니는 건 소년에게 "정말 힘든 경험"이었다. 일본 아이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박소희를 비웃었다. 참다못해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 신주쿠에 있는 한국 학교로 옮겨 달라 졸랐다. 하지만 기자이자 재일교포 운동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반대했다. "수치스럽게 생각하면서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다고 하셨죠. 한국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라고요. 그게 저에게도 일본 사회에도 좋은 일일 거라고 말씀하시면서요." 그렇게 자란 박소희의 취미는 무술이다. 그는 "일본에서 박소희로 살아가려면 강인해져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강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가라테를 배운 그의 몸은 할리우드 액션 스타처럼 탄탄하다.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성장통을 치른 박소희는 명문 사립 와세다대에 진학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택한" 전공은 무역학이었다. 국제 무역가를 꿈꾸던 청년은 결국 배우가 돼 전 세계를 돌며 촬영한다. 일본에서 2002년 연극 '벤트'에 출연한 뒤, 2009년 영화 '라면 걸'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 왔다. '파친코' 촬영을 위해 부산 영도의 수산물 시장도 방문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곳이 부산이었어요. 20대 때, 시모노세키에서 페리를 타고요. '파친코' 촬영이 없을 때 부산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부산 사투리 특유의 톤을 좋아하죠." 박소희는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 산낙지가 들어간 해물탕을 꼽았다.
윤여정과 와인 마시며 나눈 대화
박소희는 카메라 밖에서 윤여정을 "YJ"라 부른다. 드라마 속 모자는 촬영 후 종종 와인을 마시며 정을 나눴다. "부산에서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함께 연기하게 돼 영광입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선생님께선 '영광'이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말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굉장히 쿨하신 분이죠?" 박소희는 윤여정이 일본어로 연기할 때 종종 눈가가 촉촉해지곤 했다. "재일교포 1세대인 제 할머니가 쓰는 일본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박소희는 올봄 '파친코' 미국 시사회에서 한반도와 일본 지도 모양의 배지를 양 가슴에 달고 레드카펫에 섰다.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조선인)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바람은 '자이니치'가 영어 사전에 등재되는 일이다. 일본 일부 우익 누리꾼은 항일의 정신이 부각된 '파친코'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익명으로 쏟아내는 혐오의 말을 믿지 않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아직도 돌려 봐요. 용기가 필요할 때 안정환 선수가 선사한 멋진 골을 보면서 힘을 얻죠. 저랑 나이가 비슷하더라고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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