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9> 진도 용장산성
해남이 반도의 끝이라면 진도는 한반도 남쪽 끝의 큰 섬이다. 현대사에 ‘세월호’라는 슬픈 역사가 새겨졌지만, 중세사에도 처절한 역사가 있었다. 바로 '삼별초의 난’ 현장이다. 강화도로 밀려난 고려 무신정권의 군인이자 경찰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가 고려왕 원종이 원나라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반대하며, 원종 11년인 1270년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지휘로 군사와 민초들을 이끌고 강도 외포리를 떠나 두 달 만에 진도로 들어왔다.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용장산성에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고 제주도로 쫓겨가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결사항전을 했던 곳이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산성에서는 그 처절한 전투의 흔적을 볼 수는 없지만 널찍하게 남아 있는 성의 흔적에 삼별초들의 허망한 항몽의 꿈이 배어 있다.
진도에 들어서면
비운의 역사를 암시하듯, 흐릿한 안개가 드리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진도는 자연도 아름답지만, 풍성한 전통문화로 인류학 연구자들에게는 '꿈의 필드'여서 학생들과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녀온 곳이다. 30여 년 전 답사 중에 보았던 씻김굿이나, 아침에 나서던 꽃상여가 담장 위 감나무 가지에 붉은 색종이 꽃을 하나 걸어두고 지나가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목포에서 출발하면 한 시간 남짓이면 쌍둥이 진도대교가 놓인 울돌목 해협에 도착한다. 입구에는 우수영(右水營)이 있는데, 바로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통쾌한 승리를 그린 영화 명량(鳴梁), 우리말로는 '울돌목'의 실제 현장이기도 하다. 울돌목은 조류가 급하여 파도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리를 건너면 곧 삼거리가 나타나고 좌회전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가는데 멀리 푸른 파도의 수군기지, 벽파진이 보인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재기한 곳이다. 고개 아래 삼거리에서 용장성(龍藏城)이라고 새겨진 큰 돌 이정표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용장골이라는 이름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용이 숨은 곳이라는 뜻이니 결국 작은 고려국이 생길 것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니 배중손 장군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앞에 궁전터가 골짜기 가득 펼쳐진다.
옛 궁전터
용장골은 낮은 산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궁터가 보이지 않는다. 산등성이를 따라 바다를 낀 길이 13㎞에 이르는 토석(土石)혼축의 용장산성은 내부 면적은 넓지만 궁전터가 남아 있는 골짜기 낮은 지대는 좁고 급하여 단차(段差)가 크다. 또 동편으로는 깊은 골짜기에 물길이 흘러 지속적인 침식의 위험이 있다. 궁터에는 60여 개 동의 건물이 9개의 단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탐방로를 따라 맨 위의 건물지까지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이 급해서 조심스러웠고 ‘미끄럼 주의’라는 간판이 있는 걸 보면 습해서 이끼가 끼는 계절이 있는 모양이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발굴로 드러난 건물의 배치나 구성은 개성의 만월대를 연상케 한다. 연이은 건물이 골짜기를 가득 채운 장관이었을 것이다. 흙과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쳐진 왕궁터의 맨 꼭대기 단에는 왕의 공간인 '정전'(正殿)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배치됐고 서쪽 측면에는 의례적 기능을 가진 건물이 드러났다. 서편의 건물터에서 드러난 아궁이들은 분명 왕을 비롯한 귀인들의 침소였을 것이다. 발굴된 유물들도 최고급의 청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왕궁터 서편 산사면의 관람석에 홀로 앉아 깨끗하게 보존된 적막한 고려궁터를 내려다보니 노란 유채꽃이 무심하게 바람에 흔들린다. 마음 한구석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용장성 사람들에 대한 애잔함이 피어오른다.
미래의 궁전
삼별초는 강화를 떠나올 때 급히 움직였을 것이다. 원나라 군대가 강화에 들어오면 신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을 터. 기록에 따르면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서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와 9개월 정도 머물렀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경황 없는 피란 과정에서 반듯한 건물들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기둥자리나 정연한 배치 구도, 엄청난 기와의 양과 막새기와에서 보이는 고구려 계승 정신 등을 보면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왕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용장성은 삼별초 항쟁을 넘어 미래의 도성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발굴에서 드러난 명문기와나 다른 유물들의 시대도 13세기 초, 즉 한 세대 전을 말하고 있다.
진도는 고려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최항(崔沆)이 스님으로 있었던 곳이다. 원종10년, 즉 몽골항복 직전인 1269년 남해에 있던 국사(國史,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책)를 진도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용장성도 무신정권 마지막 단계의 권력자인 임준 등이 천도를 준비하면서 보완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발굴에서도 신라 시대부터 있던 절터를 확장해 왕궁으로 확장했음이 확인됐다. 또한 강화에서 견디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흔적일 것이다. 강화나 진도 모두 세운선들이 바닷길로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고, 진도는 개경에서 멀고 해류가 급해 접근이 어려우니 방어에 용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또 다른 무인정권인 삼별초가 그 궁을 접수해 사용하게 되었으니 실패하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이 적중한 셈이다.
진도에서 세 번 피는 동백꽃
우리말 지명은 '인달도'로 추정되지만 홍보책자에는 진도, 즉 보배의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 삼별초, 별초 등 삼별초를 기억하게 하는 문구들이 보인다. 그만큼 삼별초에 대한 진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울림이 있는 것일까. 육지에서는 잊힌 역사로 그저 왕권에 반기를 들었던 난리로 묘사되지만 진도사람들에게는 잊혀질 수 없을 것이다. 고려 조정의 무능과 몽골의 학정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삼별초가 새로운 세상을 가지고 올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한동안 삼별초가 전주 등의 내륙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도 역시 그러했을 것이고 새로운 왕과 함께한다는 것이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삼별초가 려몽연합군에 의해 격멸된 후 진도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몽골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진하게 붉어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동백꽃이 진도에서는 세 번 핀단다. 나무에서 한 번, 떨어져서 땅 위에서 한 번 그리고 진도사람들의 마음속에 한 번. 이번 여행에서 이 말을 들으며 마음이 찡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항몽 왕조 최후의 장면
삼별초의 최후는 제주도에서 맞이하지만 사실 왕조는 진도에서 끝이 났다.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承化侯 溫, ?~1271)이 진도에서 참살당했기 때문이다. 용장궁의 남쪽, 진도군청에서 운림산방 가는 길 고개마루의 바로 아래 그의 묘가 있다. 묘 앞 돌계단마다 그의 처절한 죽음을 애도하듯 동백꽃이 다시 피고 있다.
그런데 배중손 장군의 최후는 어디에서였을까? 역사 기록과는 달리 전시관의 해설사는 벽파진에서 용장성으로 넘어오는 려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왕온보다 먼저 죽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굴포항에 있던 배중손 동상이 용장성 궁궐 앞으로 옮겨지고 사당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이유란다. 죽은 패장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간 남도진성 동문 앞의 간판에 팽목항 방향이라는 안내가 보인다. 반대편은 굴포항으로 가는 길이다. 북쪽의 금갑진까지 모두 제주로 향하는 진(津,나루)들이다. 진도의 길 위에서 려몽연합군에 쫓겨 제주행 나루를 찾던 진도 삼별초의 최후의 장면을 그려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현재에도 지구상에 일어나는 비극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배중손과 삼별초는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에선 반란군으로 평가되지만, 오늘날에는 처절한 항몽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왕심, 군심 그리고 민심이 외적의 침략 속에서 흔들리던 절박한 혼돈의 시대에 내가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스름한 저녁 조명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진도대교 다리를 지나며 머릿속을 울리는 질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