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와 맘 놓고 '라떼 서사'를 읊어보자

입력
2022.04.28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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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만나지 못했던 대학 때 친구를 얼마 전 만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연락만 할 뿐이었던 친구를 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인 동네 노포, 국숫집으로 향했다. 전부터 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준다며 친구는 내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1991년 여름 어느 날, 방학을 맞아 본가에 내려가 있던 친구에게 보냈던 나의 손편지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펼쳐 보았다. 낡고 오랜, 세월 묻은 세 장짜리 빽빽한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지금 우리 큰아이 또래의 내가, 내 꿈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젊은 날의 내 불안이 거기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과거 혹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감상적인 동경 혹은 애틋한 감정을 가리켜 향수(鄕愁)라 일컫는다. 향수를 느끼는 사람은 '달곰씁쓸한' 양가감정, 즉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맛보게 마련이다. 인생에서의 보물 같은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슬픔, 한때 중요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기에, 향수는 '애틋한 즐거움'이자 '슬픈 기쁨'이다. 아마 그날 내가 느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정체가 바로 '향수'였던 듯하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과거에 대한 회상은 상처와 좌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옛일에 대한 비애와 한탄 뒤에는 여지없이 '그래도 그 시절이 아름다웠고 소중하다'라는 인지적 과정이 뒤따른다.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신과 삶 전반에 대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소중한 경험에 대한 회상이 불러오는 향수라는 감정은 영웅의 '구원 서사'만큼이나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얘기다. 삼십 년이 넘도록 친구네 시골집 서랍 속에 있었던 내 청춘과 만난 그날 나는, 내 모든 삶의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천천히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삼십 년 지기와 파전에 막걸리까지 걸치며 지난 세월 동안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은은하게 행복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슬픔만이 아니라 따뜻하고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어떤 시련과 역경을 겪을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니 말이다.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 활용 가능한 자원들이 이토록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기에, 아마도 우리 주변에는 틈만 나면 지나간 젊은 시절을 '라떼는 말이야~'로 읊어대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마음 저변에는 사랑과 관심, 또는 타인과의 연결 등에 대한 희구가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지지받고 기대고 싶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하고 또 자꾸만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대개 이런 일방적인 '라떼 서사'가 자주 반복되면 젊은 세대에게 '꼰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는 건 그들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반가운 선물 같은 향수라는 감정이 우리가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치트 키라면, 어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금, 후배들 눈치 보지 말고 모처럼 오랜 친구와 만나 그때 그 시절 '라떼 서사'를 당당하게 읊어보는 것이.


이정미 서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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