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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손동작이 아니라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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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윤여정이 시상자로 나와서는 청각장애가 있는 배우 트로이 코처를 수상자로 호명하며 '축하합니다'를 수어로 해, 감동을 줬다는 소식이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미국 수어라고 명시한 다수 영어권 뉴스와 달리 한국은 대부분 신문 기사와 TV뉴스에서 그냥 '수어'라고만 언급했다.
양손을 맞쥐고 살짝 흔드는 '축하합니다' 손동작은 '미국 수어'다. 뉴스나 기사 안에서 일일이 나타내진 않더라도 서두에 한 번은 짚고 넘어갈 만한데 아쉬웠다.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쓰는 수어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수어 사이에 공통점도 물론 있으나 한국 수어 '축하합니다'는 미국 수어와 다르다. 한 손으로 턱을 감싸면서 미끄러지듯 내려와서 축포가 터지듯 팔을 살짝 위로 올리며 열 손가락을 위로 펼친다. 언어마다 수어가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영어권이라도 영국 수어는 또 다른데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동그라미를 그리듯 앞뒤로 움직인다.
수어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를 늘 그대로 옮기지는 않고, 체계도 좀 다르다. 독일어권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수어가 다 다르다. 반대로 서로 다른 언어끼리 비슷한 수어 어휘도 있다. 이처럼 음성언어랑 수어는 관계가 꼭 직접적이지는 않아서 미국과 영국 수어는 뿌리가 전혀 다른 반면, 남북한의 수어는 일본 수어라는 뿌리가 같고 50년대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대만 수어도 뿌리가 같은데, 비슷한 어휘 덕에 공통점도 있다는 것이다. 언어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한국, 일본, 대만 수화가 서로 완벽히 통할 수는 없다.
수어 사이에도 차용어가 생긴다. 엄지, 검지, 새끼손가락을 올리는 미국 수어는 ‘사랑해요’를 뜻하는데 그걸 쓰는 영국 수어 사용자도 있다. 몇몇 단어나 주요 표현으로 국제 공통 수어를 제한적으로 만들 수는 있으나, 결국은 개별 음성언어의 문법과 어휘나 표현이 각기 다르고 수어도 그것과 연동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려면 에스페란토 비슷하게 아예 새로운 수어를 만들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에스페란토가 그렇듯 보편적인 세계 공통어로서 쓰인다는 보장은 없다.
개별 수어도 각 음성언어와 자격이 동등한 개별 언어다. '축하합니다'도 '축하+하다'가 아니고 '행복/복'을 뜻하는 턱을 감싸는 손동작에 폭죽 등을 '터뜨리다'를 뜻하는 열 손가락을 올리는 손동작이 이어진다. 한국어 수어는 음성언어와 달리 높임말이 따로 있지는 않고 태도나 표정, 동작에 따라 구별되므로 '축하합니다'든 '축하해'든 두루 쓴다.
음성과 문자가 아닌 몸짓과 손짓으로 이뤄진 수어는 소통과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밥 먹었어.'와 '밥 먹었어?'의 억양이 음성언어에서 다르듯 수어도 의문문에서 표정이 더 커지며, 다른 수어들도 비슷하다. 표정과 손짓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말의 뉘앙스나 감정의 차이도 전달된다.
손짓이나 몸짓은 나라나 언어마다 조금 다르긴 하나 공통점도 많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한 의사 전달에만 쓰며 복잡한 의사소통은 할 수 없다. 수어는 단순한 손동작만이 아니고 저마다 체계적 어휘와 문법을 갖춘 또 다른 언어다. '수화'를 '수어'로 바꿔 부르는 움직임도 '언어'임을 반영한다.
감동스러운 소식을 전하는 언론도 수화의 존재를 좀 더 눈여겨보길 바란다. 귀가 들린다고 말이 나온다고 늘 완벽한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익숙한 세상의 얘기만 보고 듣는 경향도 있다. 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손짓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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