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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자수에 구슬 총총… 여성만 쓰는 싸니족 모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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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중국 쿤밍과 베트남 하노이를 잇는 철도가 개통됐다. 프랑스의 식민지 수탈 노선인 전월철로(滇越鐵路)다. 쿤밍보다 1년 먼저 벽색채(碧色寨)역이 생겼다. 쿤밍 남쪽 260㎞지점이다. 총 길이 855㎞의 철로는 해방 후 국제 물류를 담당하다 현재는 운행이 중단됐다. 기차역은 옛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가 됐다. 훙허하니족이족자치주(紅河哈尼族彝族自治州) 주도 멍쯔(蒙自)시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다. 그냥 역일 뿐인데 관광객이 꽤 몰린다.
강판으로 만든 조형물이 보인다. 공사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다. 철도가 지나는 역의 개통 연도와 해발을 표시했다. 표고가 거의 1,900m에 이를 정도로 편차가 컸다. 산악 지대가 많아 공사가 험난했다. 협곡은 철교와 석교로 이었고 수많은 터널을 뚫었다. 궤도는 표준보다 좁고 협궤보다 넓어 딱 1m다. 길이 단위인 미(米)를 따서 미궤다. 관광객이 난데없이 인민군 복장으로 활보하고 있다. 마오쩌둥 장정 시절의 홍군도 아니고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 모습은 더더구나 아니다. 뜻밖의 옷차림은 이유가 있다.
역사 벽면에 미소가 예쁜 여성 사진이 걸려 있다. '방화(芳華)'라고 쓴 글자가 해답이다. 영화 제목이다. 2018년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청춘, 그 날의 설렘처럼’으로 소개됐다. 1970년대 문화혁명 시기 인민군 문예공작단에 소속된 젊은 청춘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애국주의 ‘국뽕’ 영화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은 긴 호흡으로 세월의 무게를 잇고 있다. 갈등과 화해, 회한과 용서까지 진하게 녹여낸 수작이다.
펑샤오강 감독의 작품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옌거링의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이며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여자 주인공이 문공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간호병으로 차출당한다. 1979년 발발한 베트남과의 전쟁도 등장한다. 상처 입고 죽어가는 병사를 치료하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다. 세월이 흐른 후 마음에 담았던 옛사랑을 고백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황토색 역사가 맑은 날씨와 어울려 동심을 깨운다. 군복을 빌려주니 철길 위에 인민군이 바글바글하다.
멍쯔에 가면 쌀국수 미센(米線)을 먹어야 한다. 궈챠오미센(過橋米線)이라 부른다. 중국 서남부 일대는 쌀국수 세상이다. 동네마다 서로 자랑하니 가는 곳마다 먹어보지만 ‘다리를 건너는 쌀국수’는 비교 불가다.
교지정(橋之情) 전설이 전해온다. 청나라 초기 호수 근처에 사는 서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했다. 참다못한 부인이 ‘사내대장부가 출세에 뜻이 없고 가족의 명예는 생각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서생은 반성하고 호수 안 서재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부인은 공부에 지친 서생을 위해 육수를 끓이고 국수와 고기를 준비했다. 철없는 아들이 실수로 고기를 탕 속에 넣었다. 뒷바라지하느라 노역이 많던 부인이 요리를 들고 호수의 다리를 건너다 혼절했다. 한참 후 서생이 달려왔고 부인이 깨어났다. 다행히 탕은 쏟아지지 않았다. 고기 기름 덕분에 별로 식지도 않았다. 우연하게 비법이 생겼다. 전설은 언제나 마무리가 교훈이다. 서생이 과거에 합격했고 미담은 널리 퍼졌다. 비법은 ‘따로 국수’다.
8개의 종지가 담긴 큰 접시가 나왔다. 부추, 콩나물, 두부, 파 등이 담겼다. 조금 작은 접시도 따로 나오는데 얇게 썬 생선과 닭튀김이다. 날계란도 함께 나온다. 큰 그릇에 담긴 탕은 뜨겁고 아주 크다. 직원이 한 그릇씩 조심조심 들고 온다. 따로 나오는 국수의 양도 넉넉한 편이다. 모두 1인용이다.
큰 접시 가운데 노란 재료는 장식인 줄 알았다. 먹으라고 가져왔다며 국화 꽃잎이라 한다. 탕에 국수를 섞고 온갖 재료를 다 넣은 다음 꽃잎을 뿌리니 화룡점정이다. 국화꽃 활짝 피어나는 쌀국수다. 눈이 먼저 감동하니 맛 또한 일품이 아닐 수 없다.
멍쯔에서 동북쪽 200㎞ 지점에 추베이(丘北)가 있다. 원산좡족먀오족자치주(文山壯族苗族自治州)에 속한 현이다. 뜻밖에 이족(彝族) 말로 ‘물고기와 새우가 가득 담긴 호수’라는 뜻인 푸저헤이(普者黑)가 있다. 길쭉하게 물줄기가 연결된 호수다. 잔잔한 강물과 비슷하다. 호수를 따라 마을이 군데군데 조성돼 있다. 예약한 숙소가 있는 선인동촌(仙人洞村)으로 간다. ‘마을에 오면 모두 가족’이라는 입구의 현수막이 정겹다.
두어 걸음이 호수인 르자바이자(日扎白扎) 객잔에 짐을 풀었다. 이름이 독특해 그 뜻을 물었더니 하오수이하오산(好水好山)이라 한다. 아래에 생소한 문자가 적혀 있다. ‘이곳 말’이라 하니 이족 언어다.
문자 하나마다 하나의 음절이 대응하는 언어다. 음절 문자라 한다. 약 1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한자만큼 장난이 아니다. 이족 사전을 뒤지니 산(山)은 ‘ꁧ’이라 쓴다. 중국어 아래 쓰려니 눕혀서 쓴 모양이다. 발음은 뽀(bbo)인데 왜 바이(白)라 번역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이족 말도 지방마다 발음이 다르다 한다.
물 좋고 산 좋다는 말 그대로다. 푸저헤이는 카르스트 봉우리 천국이다. 멋대로 솟은 봉우리가 멋지다. 호수라는 도화지에 그린 봉우리다. 스쳐가는 구름과 노을도 물감처럼 슬며시 제자리를 찾는다. 해 넘는 때를 맞추면 어디라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커피 한잔하며 적막을 즐긴다. 골목으로 사람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간다. 일어나 고개를 내민다. 한 아주머니가 쓴 모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러 사람이 지나가는데 꼭 여자만 쓰고 있다. 분명 곡절이 있을 듯하다.
바깥은 서서히 사람으로 붐빈다. 관광지로 변해 식당과 객잔이 많다. 희귀하게 생긴 조형물이 보인다. 뚫린 두 눈, 다문 이빨, 보조개 부위에 꽂힌 나무칼. 괴상한 모습인데 가까이서 보니 귀엽기도 하다. 이족 토템의 수호신이다.
겨울이 시작되면 밀지절(密枝節)이라는 축제를 연다. 뒷산에 신변을 보호해준다고 믿는 나뭇가지가 하나씩 있다. 이를 밀지, ‘비밀 나뭇가지’라 한다. 남자들이 가축을 잡고 제사를 지낸다. 제사 공간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수호신을 만든다. 조형물의 두 눈은 해와 달이다. 비밀을 발설하지 말라는 입과 칼이다.
식당 입구에 목각 아가씨도 모자를 썼다. 식당 아주머니도 모자 쓰고 요리하고 있다. 푸저헤이에는 이족의 한 갈래인 싸니족(撒尼族)이 많이 산다. 중국은 갈래가 엇비슷한 소수민족을 묶어서 분류한다. 민족마다 다른 갈래를 풀어놓으면 아마 수백 개는 될지도 모른다. 1,000만 명에 육박하는 이족 중에 싸니족은 10만 명 정도다. 독특하게 생긴 모자는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싸니족의 상징과도 같다.
화바오터우(花苞頭)라 부른다. 수놓은 꽃 자수에 구슬을 골고루 심었다. 자수는 알록달록한 천을 사용해 울긋불긋하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연인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변했다는 싸니족의 전설이 있다. 연인을 그리워하며 모자를 쓰고 다니는 풍습이다. 앞부분은 삼각형 두 개가 마치 날개처럼 펼쳐진 모양이다. 이를 채접(彩蝶)이라 한다. ‘아름답게 채색한 나비’다. 나비가 돼 훨훨 연인에게 날아가려고 쓰는가?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인가? 볼수록 예쁘장하고 당당해 보이는 모자다.
객잔에서 어둠 초입의 낭만과 만난다. 봉우리는 검게 변했고 노을은 붉게 불타고 있다. 여행이란 낯선 세상에서 만나는 색다른 기쁨이다. 그 어디에도 없던 ‘이곳만의 감상'이 선물이다. 추억 상자에 비밀스레 담는 일이다. 맥주를 따고 또 딴다. 달콤하게 스며드는 술기운만큼 검붉은 기운이 깊어간다. 암흑으로 변해가는 하늘 저 멀리서 조금씩 별과 달이 따라온다. 누가 먼저 호수로 슬그머니 들어오는지 보려고 오래오래 응시한다.
눈을 뜨고 창문을 여니 봉우리가 호수 안으로 가라앉았다. 봉우리를 가르며 나룻배가 떠간다. 일찍 움직인 사람들은 벌써 호수를 질주하는 중이다. 푸저헤이는 165㎢에 이르는 카르스트 지형에 호수와 습지가 남북으로 길게 10㎞에 이른다. 부두가 많아 어디서도 나룻배 유람을 즐길 수 있다. 푸차오탕(蒲草塘) 부두로 간다. 북쪽 끝자락 청룡산(青龍山)까지 1시간 동안 호수 유람을 시작한다.
나룻배가 서서히 물살을 헤치기 시작한다. 뱃사공이 노를 젓는다. 호수가 좁아지면 맨땅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넓으면 멀리 보인다. 물길을 따라 요리조리 물살 없는 호수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함께 노를 젓기도 한다. 조금 빨라지는가 싶은데 오십보백보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반영이 거듭된다. 시든 연꽃의 잎사귀가 군락을 짓고 있다. 길게 자랐던 줄기가 꼿꼿하게 남아 크기가 두 배다. 슬로비디오로 배가 지나가서 그런지 끄떡하지 않는다.
양쪽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가 자주 나타난다. 물길의 너비만큼 다리는 길거나 짧다. 호반 식당이나 객잔도 많다. 다닥다닥 붙은 강남의 수향과 분위기가 색다르다. 건물도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서 훨씬 한가롭고 고요하다. 주르륵 밀려가는 나룻배는 어느덧 정자가 보이는 다리로 다가간다. 정인교(情人橋)다. 연인끼리 건너는 다리인지 모르겠다. 다리 아래를 통과하니 정자가 또 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쌍쌍으로 모두 4개다. 점점 호수가 넓어지고 종착지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려 청룡산을 오른다. 꽤 가파르다. 약간 숨이 가쁘지만 정상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푸저헤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다.
호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이 보이고 뒤쪽으로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위에서 봐서인지 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해가 뜨거나 질 때 보면 어떨까? 흐린 날씨여서 아쉽긴 한데 새파란 하늘이라면 정말 환상이겠다는 생각이다. 상념에 젖어 한참 바라본다.
2~3분 거리에 있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방향이 다르니 다른 전경을 관망할 수 있다. 비슷한 듯 또 다른 경관이다. 봉우리가 좀 가깝다. 이쪽 방향에서 드라마를 촬영했다고 홍보가 대단하다. 엄청난 인기를 끈 ‘삼생삼세십리도화(三生三世十里桃花)’라는 드라마다. 2017년에 방영됐는데 취향에 맞지 않아 보지 않았다. 게다가 58회나 되는 대작이니 시간 내기가 어렵다. 얼마나 인기를 끌었길래 도화 피는 봄이 성수기라 하는지 궁금해진다.
아이들과 놀러 가는 ‘아빠! 어디가?’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중국도 ‘바바취나얼(爸爸去哪儿)’이란 제목으로 방영했다. 프로그램 초창기인 2013년에 푸저헤이에서 촬영했다. 이때 인기 관광지가 됐다. 비수기에 갔더니 관광객이 별로 없다. 한가해서 좋기는 한데 꽃이 만발한 계절에 다시 오고 싶다. 청룡산을 내려와 전동차를 타고 돌아온다. 차에서 내려 호수를 바라보니 햇볕이 강렬하게 빛을 뿜는다. 멀리 청룡산이 보이고 시든 연꽃이 자꾸 가슴에 담긴다.
북쪽으로 약 160㎞ 떨어진 뤄핑(羅平)으로 간다. 윈난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구이저우와 닿아 있는 도시다. 1월부터 시작해 2월에 유채가 만발하는 곳이다. 유채꽃 명소가 많아 관광지로 유명하다. 시내 북쪽 10㎞ 거리에 있는 나사전(螺絲田)으로 간다. 찻길은 언덕을 타고 오른다. 설마 유채가 산꼭대기에? 한참 오르니 주차장이 나타난다. 시선 아래에 유채가 보인다. 막 피기 시작했는지 살짝 아쉽다.
나사는 나사못이다. 생김새가 나사와 닮았다는 말이다. 층층 계단으로 조성돼 색다른 느낌이다. 처음 봤을 때는 덤덤했는데 볼수록 동심원의 밭이 정겹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원이 시야에 잡힌다. 밭 가운데 높고 낮은 나무는 그만큼 길고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초록에서 연두로, 다시 노랑으로 변해가는 나사를 상상한다. 어디나 그렇듯 다 보려면 계절마다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15㎞ 떨어진 금계봉총(金雞峰叢)으로 간다. 기록을 보니 두 번 갔다. 날씨가 쾌청한 날 1월 9일이었다. 유채가 겨우 노란색을 막 풍기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1월에 유채를 보다니 신기했다. 샛노란 풍광을 기대했는데 적절한 때가 아니었나 보다. 2월 17일에도 갔다. 비 내린 후라 물기 머금은 유채가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카르스트 봉우리가 유채 사이에 봉긋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시야에 펼쳐진 노란 유채의 향연이 드러난다. 흐린 날씨 탓에 봉우리 끝자락을 살짝 가리고 있다. 유채가 완연하게 제 빛깔을 뿜어내고 있는데 습기 때문인지 약간 어두운 느낌이다. 비 젖은 땅은 붉은 색감이고 유채는 반짝거린다. 유채 한가운데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걷는다. 새파란 하늘이라면 샛노란 유채가 금상첨화였겠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둘이 타는 자전거가 있다. 나란히 바퀴를 굴리며 유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편안한 걸음으로 유채의 품으로 들어가 깊고 진한 맛을 마신다. 오로지 하나의 물감으로 뿌린 도화지와 같다. 흐린 날씨면 어떠리. 여행이란 날씨와 인연으로 만나는 일이다. 그 인연이 좋다 싫다 투정할 필요 없다. 눈 앞에 펼쳐진 장면 그대로를 감동으로 색칠하는 일이다. 여행이 중독이고 행복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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