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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간 963만원 뺏기고, 대포통장 개설 강요...전차선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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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차선을 시공·유지·보수하는 전차선 노동자 이모씨. 업계에 몸담은 18년간 임금 중간착취를 수차례 당했다.
공사일수가 20일이라면 중간 도급업자들이 "너희 일당이 원래 20만 원이라 400만 원 들어오는 게 맞지만 원청에 공사일수를 25일로 불려 보고했다"며 "그러니 5일치는 다시 우리 쪽에 입금하라"고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급여 통장에 들어온 500만 원 중 100만 원을 고스란히 중간 도급업자에게 보냈다. 자신의 실제 몫이 400만 원인지 500만 원인지 이씨가 알 방법은 없었다. 이씨는 "전차선 노동자들이라면 대부분 겪어본 일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부터 국가철도공단이 발주한 공사 현장에서 근무를 시작한 A씨는 도급업체인 GS네오텍 소속 공사부장 김모씨로부터, 임금을 환급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6개월간 963만 원을 입금했다. 참다못해 항의하자 A씨는 계약을 해지당했다.
이들이 겪은 일은 모두 불법이다. 전기공사업법은 재하도급을 금지하고 있고, 근로기준법은 중개인의 임금 중간착취를 금지하고 있다. 보통의 용역·파견 노동자들은 원청이 주는 인건비를 업체가 대폭 착복해도 불법이 아니지만, 전기공사는 다르다. 그러나 현실은 법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랜기간 감시와 처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피라미드 최하부 노동자의 고통은 20여 년을 이어져 오고 있다.
경력 20년차인 전차선 노동자 김모씨는 임금 중간착취를 위한 대포통장 개설에 동원된 경험이 있다. 김씨는 "현장에 가면 중간 도급업자들이 다짜고짜 급여통장 외 통장을 하나 더 개설하라고 통보했다"며 "통장 개설의 명목도 모르고 만들어 주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돌려주지 않아서 거래 내역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국건설노조가 설립되기 전인 2018년까지 수시로 이런 일을 겪었다.
역시 경력 20년차인 노동자 B씨도 "중간 도급업자들이 현장 노동자 수보다 명수를 늘려 원청에 보고하고, 없는 노동자 몫의 급여를 빼돌리려 우리가 추가 개설한 통장을 썼다"고 설명했다. B씨는 "개설 강요에 불복하면 일감을 받을 수 없으니 아내, 친척 명의까지 끌어다 통장을 만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차선 노동자는 전기업체들에 직고용됐으나 외환위기 이후 일용직으로 전환됐다. 국가철도공단은 중간착취를 막기 위해 공공기관 최초로 ‘체불e제로'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스템에 연동된 가상 계좌를 통해 근로자 임금은 해당 근로자에게 직접 지급한다. 그런데도 일용직들의 목줄을 쥔 중간업자가 환급 형식으로 임금을 착복하는 것이다.
전차선·전력 업계 상당부분의 중간 도급을 담당하는 박모씨는 ‘전차왕'으로 불린다. 노조는 A씨에 대한 중간착취에도 'GS네오텍-중간 도급업자 박모씨' 간의 불법하도급 관계가 있다고 본다. A씨 임금을 꼬박꼬박 환급해 간 공사부장 김모씨의 배후에 박씨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흥석 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 사무국장은 "현재 박씨가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건이 우리가 파악한 것만 6건"이라며 “박씨가 중간에서 착복하는 금액은 최소 10% 이상”이라고 밝혔다. 전차선 공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철도공단 발주 공사를 예로 들면, 공사를 80억 원에 낙찰받았다면 박씨가 챙기는 금액은 최소 8억 원이라는 설명이다.
이 사무국장은 "작은 공사까지 담당하는 도급업자를 합하면 전국 10여 명 규모인데 그중 큰 공사만 겨냥하는 주요 도급업자는 박씨 계열이라고 보면 된다"며 "일례로 강원 삼척시에 있는 주요 전기업체만 해도 박씨가 키운 사람이 업자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업계 생리상 한 도급 업체가 계속 같은 인력을 데리고 있을 수 없는데, 발주처는 계속 숙련자를 원한다"며 "그러니 이전에 일했던 사람이 2, 3년간 같은 현장에 연속적으로 갈 수 있도록 중간에서 소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 하나가 업계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전차왕'이라는 발언은 말도 안 된다"며 "그 누구의 임금도 중간착취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자재나 인건비까지 모두 재하도급을 받는 불법을 저지른 일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이흥석 사무국장은 그러나 "재하도급은 자재까지 통으로 포함한 형태와, 인력만 공급하는 형태가 있다"며 전기공사업법이 금지한 불법 재하도급이라고 설명했다.
김세정 민주노총 법률원 노무사도 "직접 드러난 형태로의 재하도급은 아닐지 몰라도 사실상 재하도급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며 "현장 노동자들은 업체의 현장이 아니라 ‘박씨의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형식적으론 업체와 근로계약을 맺었더라도 실제로는 박씨와 박씨 밑에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직접 작업 지시를 받고 근로 조건도 그들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심지어는 전차선 공사에 앞선 기초 토목 공사 기간에 전차선 노동자들이 일을 못 하게 되면, 박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다른 불법 하도급 현장으로 노동자들을 보내서 일을 할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며 "그런 것만 봐도 박씨가 실질적으로 사용자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그러나 “2005년부터 다른 회사에 적을 두고 현장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고 GS네오텍에서는 옛날에 일했을 뿐 지금은 전혀 관계가 없다"며 "(공사) 현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공사부장인) 김씨도 오래전부터 알고 같이 일하던 동료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철도공단 측은 "박씨에 대한 불법 하도급 의혹 제기가 수차례 있어 현장 점검을 나가 봐도 박씨가 관련 시공사 근로자 명단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등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어 “공단은 원청 측이 현장 감리단에서 확인한 만큼의 적절한 급여를 근로자 통장에 입금하는지까지 확인한다”고 덧붙였다.
A씨는 지난 1월 GS네오텍과 김씨, 박씨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했다. 부당해고, 중간착취를 문제 삼았다. 지난 2월 28일에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관련 구제 신청도 했고, 서울 구로경찰서에 재하도급을 금지한 전기공사업법 제14조 1항 위반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A씨의 신고 이후, 임금 중간착취 장본인으로 지목된 GS네오텍의 공사부장 김씨는 A씨에게 "GS네오텍이 나와 함께 당신을 고발할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고, 새로운 현장에서 일하던 A씨의 현장 팀장을 통해서도 "김씨 전화를 왜 안 받느냐, 얼른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얘기를 전했다. 여러 회유와 협박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 사무국장은 "현장 팀장을 통해서까지 김씨로부터 연락이 지속적으로 오는 상황이라서 A씨가 극심한 부담감과 불안을 호소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해 5월 전국건설노조에 대항해 설립된 '전국전철노조'도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을 저해하면서 전차선 노동 현장이 갈등을 빚고 있다. 전차선 업계의 사무직 대부분과 공사 현장 관리직 일부로 구성돼 있는데, 배후가 박씨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이 사무국장은 "전국건설노조 인원을 빼내고 단체협상을 방해하는 등 견제 목적으로만 활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B씨는 "최근 전남 지역 공사 현장에서 불법 도급업자들이 건설노조 전차선 노동자 5명가량에게 '원청으로부터 따낸 공사가 있으니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면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꼬드겨 전원 노조를 탈퇴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국전철노조는 정작 노조원 처우 보장에는 소홀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사무국장은 “사무직의 경우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업무를 하고 나면 오전 1시에 다시 불러내는 일이 잦지만 추가 수당 없이 월급 250만 원이 전부인 게 현실"이라며 "전국전철노조는 이를 쇄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노조 유지에 필요한 숫자로만 사무직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전국전철노조' 설립에 대해서도 "본인이 세운 건 아니다"라며 선을 그으면서도 노조 설립 취지 자체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기존 건설노조에 가입한 전기공사자들이 권리 주장을 넘어 태업을 했다"며 "결국 현장 관리직끼리 뭉쳐 노조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시장 논리에 따르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현장에 계속 불릴 테니 (견제용 노조가 설립된 데 대해선)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판결정보 특별열람’을 통해 조사한 결과, 근로기준법 제9조(중간착취의 배제) 위반으로 재판받은 건수는 1997년부터 최근까지 33건(구 근로기준법 제8조 포함)에 불과했다. 고용노동부에 문의해보니, 최근 10년(2012~2021년) 동안에도 근로기준법 제9조 위반으로 접수된 730건 중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건수는 166건에 불과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중간착취 배제 조항도 당연히 근로감독 대상에 포함되지만, 건설현장 반장 등은 대개 사용자성이 있어 임금지급 의무를 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슷한 중간착취 조항보다는 임금체불로 적발·신고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떼인 임금을 돌려받는 데도 임금체불 조항으로 신고하는 게 수월하다는 것이다.
전차선 노조 측은 A씨 피해사례를 근로기준법 제43조의 '임금 지급' 조항을 어긴 임금체불 사건으로도 보고 있다. 이는 ‘임금은 통화로 직접 근로자에게 전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인데, 근로계약서상 전액을 주지 않고 일부 다시 가져갔으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김세정 노무사는 "임금체불 사건은 노동청에 진정을 해서 사실관계가 인정되면, 체불임금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고 설명했다.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돈을 안 주면, 민·형사 대응이 이어질 수 있다.
반면, 근기법 9조는 노동자가 신고해서 처벌해도, 임금 중간착취 금액을 돌려받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김 노무사는 "중간착취는 형사처분을 목적으로 하는 조항이라, (떼인 임금을 받으려면) 별도로 손해액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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