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 자리 맡는 게 신입사원의 첫 업무이자 시련

입력
2022.04.16 04:40
13면

<61> ‘현대판 세시풍속’과 일본의 소비 문화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놀이 문화와 개인의 소비 행위를 효과적으로 연계한 상술과 매스컴의 적극적인 분위기 조성 덕분에 일본에서는 계절의 특성을 살린 상업적 연례 행사가 잘 정착되어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놀이 문화와 개인의 소비 행위를 효과적으로 연계한 상술과 매스컴의 적극적인 분위기 조성 덕분에 일본에서는 계절의 특성을 살린 상업적 연례 행사가 잘 정착되어 있다. 일러스트 김일영


봄의 시작 ‘하나미(花見)’에 ‘진심’인 일본인

일본에서 봄은 꽃놀이와 함께 시작된다. 일본어로 ‘사쿠라(桜)’라고 부르는 벚나무는 남도(南島) 오키나와(沖縄)부터 북단의 홋카이도(北海道)까지 일본 전역에서 자라는 수종이다. 이른 봄에 개화하기 때문에 봄의 전령사로 받아들여지는데, 작은 꽃송이가 무리를 지어 피는 모습이 더없이 화사하다. 벚꽃의 개화 기간은 두 주 정도로 짧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현세에 집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 정신을 벚꽃에 빗대기도 한다. 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모습에서 허무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벚꽃의 미학을 일본 고유의 미의식 ‘모노노아와레 (物の哀れ)’의 무상하고 애잔한 정서에 비유하기도 한다. 8세기에 쓰여졌다는 문집 ‘만요슈(万葉集)’에도 벚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실려 있을 정도이니, 일본인이 벚꽃을 사랑한 역사도 상당히 길다.

일본말로 꽃놀이를 ‘하나미(花見)’라고 한다. 아열대성 오키나와 지역에서는 2월에 벚꽃이 피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3월 중순부터 하나미 시즌이 시작된다. 열도 서남쪽의 후쿠오카에서 개화하기 시작해서 오사카, 나고야, 도쿄로 ‘벚꽃 전선’이 차츰 동진한다. 오랫동안 눈이 녹지 않는 추운 도시 삿포로에는 4월 말이 되어서야 벚꽃이 피는데, 러시아와 맞닿은 홋카이도의 북쪽 지역에서는 5월에도 벚꽃을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벚꽃이 만개하면 봄나들이가 늘지만, 일본의 하나미는 벚꽃을 그저 바라보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꽃이 만개한 벚나무 아래에 널찍하게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이른 시간부터 늦은 밤까지 부어라 마셔라 술자리가 벌어진다. 벚꽃이 개화하는 두 주 동안 하나미 명소로 알려진 공원 등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꽃놀이 인파가 모이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포장마차가 등장하고, 인근 마트나 편의점에서는 야외용 안줏거리가 불티나게 팔린다. 꽃놀이 자리를 잡는 것도 쉽지 않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이른 시간부터 장소 찾기에 나서야 한다. ‘하나미 자리를 맡는 것이 신입사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업무이자 시련’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다. 일본의 공부벌레들이 모인다는 도쿄대학교 캠퍼스에는 벚나무 대신 가을에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은행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다. 학생들이 꽃놀이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벚나무를 심지 않았다는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캠퍼스 한구석에 벚나무 딱 한 그루가 건재해서 봄이면 화사한 벚꽃을 틔운다.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캠퍼스 꽃놀이에 참가한 적이 있다. 꽤 쌀쌀한 봄날이었지만,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서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운치가 있었다. 지금도 만개한 벚꽃을 보면 맛있는 술 한 잔이 생각난다.

여름에는 ‘하나비’, 가을에는 ‘쓰키미’

하나미가 일본 봄철의 상징이라면, ‘하나비(花火)’라고 부르는 불꽃놀이는 여름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도시에서 불꽃놀이 대회가 종종 열린다. 하지만 일본의 하나비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본격적이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매년 여름 전국에서 크고 작은 불꽃놀이 대회가 줄지어 열리기 때문에, ‘하나비 달력’이 따로 만들어질 정도다. 수십만 명 규모의 관람객이 모이는 초대형 불꽃놀이 대회만 세어도 40개가 넘는다. 일본에는 16세기에 화포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들고 온 화포 병기 ‘조총’이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일찌감치 전래된 화포 기술을 바탕으로 17세기 에도시대에 화약을 다루는 전문업자가 등장했다. 이들이 화약 기술을 선전하기 위해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행사를 열었던 것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7월에 도쿄에서 열리는 ‘스미다가와(隅田川) 불꽃놀이 대회’는 역사가 100년이 넘은 유서깊은 행사다. 2만여 발의 화려한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초대형 축제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모여들 정도로 대성황이다.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것은 저녁 즈음이지만, 야외에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오전부터 인파가 몰린다. 미리 돗자리를 깔고 간단한 도시락에 맥주를 홀짝이면서 느긋하게 저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불꽃놀이 대회장은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가 많아서 알록달록한 전통 의상으로 한껏 멋을 부린 커플도 많다. 화려한 불꽃에 못지않게 볼거리가 푸짐한 여름 축제라 인기가 많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몇 년째 대규모 불꽃놀이 대회가 중지된 상태인데, 한여름을 즐기는 상징적 이벤트가 사라져 다들 아쉽고 허전하다고 한다.

한편, 가을에도 ‘쓰키미(月見)’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달구경 풍습이 있다. 하나미나 하나비만큼 축제 분위기가 달아오르지는 않지만, 가을에는 전국의 달구경 명소가 제법 북적댄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깊어지는 가을을 체감하는 것은 상점들이 ‘할로윈데이’ 준비로 분주해질 때다. 할로윈 장식품이나 코스튬, 분장용 굿즈 등이 백화점이나 마트 진열장을 가득 채우는 시기다. 서구에서는 어린이들의 축제였다지만, 일본에서는 기발한 분장을 하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대도시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나미, 하나비 등과는 계보가 다르지만,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계절 행사가 되었다. 할로윈 시즌이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리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화려한 조명 장식이 등장한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교회에 다니지는 않아도 거실에는 정성스레 꾸민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으며 파티를 한다. 봄에는 꽃놀이, 여름에는 불꽃놀이, 가을에는 달구경과 할로윈,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이런 식으로 계절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저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인은 계절 감각과 직결된 상업적 이벤트에 익숙하다. ‘현대판 세시풍속’이라고도 하겠다.

문화적 전통 상품화 역량은 수준급

우리나라에도 계절에 따른 풍습이나 명절이 존재하지만, 일본에서는 사계절과 연계된 이런 소비 이벤트의 존재감이 훨씬 크다. 일본에서 계절의 특성을 살린 상업적인 연례 행사가 잘 정착한 것에는 도시인의 놀이 문화와 개인의 소비 행위를 효과적으로 연계한 상술의 역할이 컸다. 매스컴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계절 이벤트에 참가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문화적 전통을 상품화하는 기술에서 일본 사회의 역량은 가히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세시풍속이라 함은 계절의 변화에 발맞추어 농사와 관련한 의식, 의례, 놀이 등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 농경 공동체의 풍습이었다. 그런데 현대인들도 계절에 따라 다양한 상업적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놀이 문화를 즐긴다. 농사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의례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것이다. 이런 의례적인 소비 활동이야말로 익명성이 강한 도시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계기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 활동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고도의 소비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이 돈을 버는 ‘노동자’와 돈을 쓰는 ‘소비자’의 두 가지에 국한되어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놀이 문화에서 공동체 의식에 이르기까지 도시 공간의 문화적 잠재력이 오로지 소비 행위로만 귀결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씁쓸한 마음도 있다. 일본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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