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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파병의 마지막 흔적’ 호찌민 30평 사무실, 역사의 현재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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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인정하든 안 하든, 역사는 지울 수 없다. 한국 교민사회의 베트남 진출 시작점인 파병을 기억하기 위한 상징적인 공간 하나 있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냐."
백마부대 소속 헌병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박노원(75)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베트남 해외회 사무국장은 한국일보와 만난 지난 8일 참아 온 울분을 토해냈다. 그는 열흘 전 수령했다는 호찌민 총영사관 명의의 '해외회 사무실 퇴거조치' 공문을 쥐고 있었다. 박 국장은 "우리 사무실이 있는 총영사관 별관은 참전군인들이 월급을 모아 낸 찬조금이 바탕이 돼 당시 공병 병력이 투입돼 지어졌다"면서 "건물에 대한 정당한 지분이 있는 우리를 총영사관이 쫓아낼 근거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국장이 열변을 토해낸 논란의 해외회 사무실은 주베트남 호찌민 총영사관 본관과 2.8㎞가량 떨어진 별관 3층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들여다보니 100㎡(30.25평)의 협소한 사무공간일 뿐이었다. 별관에는 해외회 말고도 △호찌민 한국교육원 △호찌민 한인회 △베트남 중남부 한인상공인연합회 △호찌민 한국문화센터 등 5개 단체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무실 이웃들은 해외회와 총영사관의 갈등이 내심 불편한 눈치였다. 한인회 관계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대부분이 이제 70~80세 노인"이라며 "어쩌면 이들 생의 마지막 활동 흔적이 될 사무실일 텐데 싸우지 말고 몇 년 정도 더 쓰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퇴거조치의 정당성과 관련한 논쟁과 무관하게, 총영사관 측이 베트남에서 국익을 위해 싸운 노병사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이 꽤 공감을 얻는 것으로 느껴졌다.
해외회 쪽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선 총영사관 별관의 내력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별관의 원래 이름은 '한국회관'이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당시 월남 교민회가 한국인을 위한 회관 건립을 제안했고, 이듬해 주월남 한국대사관은 한국 정부에 예산 지원을 건의해 승인을 얻어 냈다. 그러나 박 국장의 주장대로 월남 파병 공병대가 동원돼 1972년 완공된 한국회관은 월남이 패망하면서 1975년 4월 주월남 한국대사관과 함께 현 베트남 정부에 몰수조치됐다. 이에 한국은 서울 한남동과 삼청동에 있던 주한 월남대사관과 대사관저를 국고에 귀속시키며 맞대응했다.
냉전이 계속되면서 이후 17년을 무심히 관통했다.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던 한국회관은 한국과 베트남이 국교를 수교한 1992년 다시 부활했다. 양국이 화해의 의미로 주월남 한국대사관과 한국회관, 주한 월남대사관과 관저를 각각 상대방 정부의 국가자산으로 현지에 재등록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찾은 주월남 한국대사관은 현 호찌민 총영사관으로, 한국회관은 총영사관 별관으로 명칭이 바뀌며 현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총영사관과 해외회 모두 동의하는 공통의 역사다.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은 돈 문제다. 13일 베트남 정부 부동산 등기자료와 한인사회 기록 등에 따르면, 별관 건립 총비용 3,224만 피아스타(당시 베트남 화폐 단위) 중 한국 정부가 지원한 비용은 전체의 24.8%에 해당하는 799만 피아스타에 불과했다. 나머지 비용은 교민회가 732만890피아스타(22.7%)를 부담했고, 한국기업 등 각종 단체가 나머지 52.5%인 1,692만9,110피아스타를 찬조금으로 채웠다.
해외회는 전체 건립 비용의 40.9%를 참전군인들이 찬조금 형태로 냈다고 주장한다. 당시 참전군 병장의 월급이 57달러에 불과했지만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부족했던 자금을 거의 다 군인들이 채웠다는 얘기다. 반면 총영사관은 "당시 공병대가 건축비용 분담 및 자재ㆍ인력 지원을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인력만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며 "장병 찬조금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한국회관이 공익을 위해 민ㆍ관ㆍ군이 힘을 합쳐 지은 국가의 재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대목은 교민들이 총영사관의 주장에 힘을 싣는 부분이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휘 아래 있는 군 병력이 현역 시절 지은 건물 등에 대해 제대 후 지분을 요구하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에서다. 강명일 호찌민 총영사는 "어렵던 시절, 재일 교포들이 100% 기부해 창설된 일본 내 한국 총영사관 부지와 건물을 놓고 교포들이 소유권을 뒤늦게 주장한 경우는 없었다"며 "일부 건립 비용 분담과 공병대의 노고가 해외회의 사무실 사용 연장 여부 결정에 참고사항은 될 수 있어도 지분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총영사관 측은 특히 2016년 입주한 해외회가 최근 4년 동안 공익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등 국유재산인 별관을 사용할 명분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총영사관은 "지난달 31일 사무실 무상사용 기간 종료 이전 해외회에 그동안의 활동 내역을 보고하라고 했지만 어떤 자료도 제출하지 못했다"며 "단 두 명의 해외회 구성원이 사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간은 이제 수많은 교민과 베트남인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총영사관은 해외회 사무실을 한국어 강의실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현재 한국교육원은 별관 내 공간 부족으로 외부 다른 건물에서 매년 4만4,000달러의 임대료를 내면서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기회에 불필요한 국가 예산 사용을 줄이면서 국유재산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해외회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박 국장은 "많은 전우들이 사망하거나 귀국하면서 사무실 상주인원이 두 명에 불과한 것은 맞지만, 해외회는 참전군인의 전적지 방문이나 전쟁 중 생긴 한국인 2세 찾기 지원 등 공식 기록과 자료로 남기기 힘든 다수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종식되면 매년 많은 참전자들이 다시 베트남을 찾을 텐데 이들을 길에서 맞을 수는 없지 않냐"며 "베트남전 파병이라는 역사와 현재를 잇기 위해서라도 해외회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양측의 갈등은 사무실 퇴거 예정일인 오는 15일 이후에도 이어질 분위기다. '법에 따른 원칙 있는 행정'을 강조하는 총영사관과 "건강이 남아 있는 한 명예를 지키고 할 일은 하겠다"는 해외회의 간극은 멀고도 깊다. 총영사관이 강제집행을 자제하고 지속적인 권고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어 당장 물리적 충돌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각에선 "국가보훈처 등 한국 정부가 다른 건물에 해외회 사무실을 마련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은 한국-베트남 우호 관계에 균열을 낼 가능성이 높다. 한 교민은 "역으로 주한 중국대사관이 6ㆍ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서울 한복판에 사무실을 구해준다는 뉴스를 접했다고 상상하면 이해될 문제"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해외공간의 내부 마찰이라고 하더라도 승전국의 자부심이 강한 베트남 특성상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사안이라는 것이다. 남은 해법은 한국과 베트남 내 민간 기업 등의 대승적인 지원이겠지만, 전쟁의 잔재로 파생된 문제를 굳이 들여다보려는 단체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특정 공간 사용 문제에서 벗어나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공로는 명확하다. 이들은 자유의 가치를 위해 싸웠고,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기 한국의 성장에 초석을 닦은 국가유공자다. 총영사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양국 국민에게 전쟁의 어두운 기억을 소환시키는 매개이기도 하다. 베트남 참전 한국군은 그 존재 자체가 '역사의 아픈 손가락'인 셈이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9년 가까이 국군 31만 명이 참전했다. 베트남 통일 후 양국은 1992년 과거의 아픈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고 정리하며 화해와 협력의 양국 관계를 재개했다. 호찌민의 30평 작은 공간은, 복잡하고도 깊은 한-베트남 우호에 걸맞게 해법을 찾아야 할 당위를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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