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상래 형의 멈춘 50년 시간

입력
2022.04.11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믿고 갈 수 있겠어요?" 떨리는 나의 물음에 휠체어에 타고 있던 상래 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믿는다. 가자'라고 답했다. 18년 전 부산의 어느 지하철 역 앞, 우리는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상래 형이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지하철 입구 계단부터가 거대한 장벽이었다. 휠체어 앞에 있는 작은 바퀴를 들어서 계단 위에 얹힌 다음 뒷바퀴를 뒤에서 힘껏 밀어 힘겹게 장벽에 올랐다. 아래에는 수십 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편안하게 내려가던 계단은 가파른 절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끄러지면 죽는다.

앞바퀴를 들어 휠체어를 45도 뒤로 기울어진 'ㄴ' 자 모양으로 만든 다음 뒷바퀴만으로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사람을 실은 휠체어는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쿵, 쿵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맞춰 심장도 쾅쾅 뛰었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과 팔이 후둘거렸다. 지하철 바닥에 다다랐을 무렵 휠체어가 한 번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붙잡았고 상래 형도 나도 안도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맡겨야 했고 누군가는 생명을 책임져야 했다. 이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하면 평생 갇혀 살아야 한다. 우리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생사의 순간이 자유롭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해방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장애인들은 이동권 투쟁과 함께 자립생활 운동을 했다. 장애인들은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활동보조인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자원봉사자는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기고 자신이 원할 때 도움을 주는 거라면,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이 일상생활과 사회적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서 장애인이 필요한 시간에 임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다. 사람들은 전자가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고귀해지는 건 자원봉사자이지 장애인이 아니다. 밥 먹을 때 공부할 때 이동할 때 똥과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을 갈 때마다 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삶을 고귀하다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활동보조인이 되어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운동에 연대했다. 상래형은 동지로서 연대했던 첫 장애인이었다. 우리가 함께 투쟁한 대상은 삶 그 자체였다. 버스를 멈추고 휠체어를 들어올려 버스를 탔고, 턱이 없는 식당을 찾아 헤맸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없어 밥 먹다 말고 가까운 지하철 화장실을 가야 했다. 대중목욕탕의 대중에는 장애인이 빠져 있어 들어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몸을 훑었고 교회에서 왔냐고 물었다. 상래형은 집에서 왔다고 답했다. 투쟁에 성공하기도 했다. 활동보조인이 제도화되어 유급화됐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 상래 형과의 연락도 끊겼다. 종종 활동보조인 지원금이 너무 적다는 뉴스, 집에 화재가 났는데 활동보조인이 없어 대피하지 못하고 사망한 뉴스, 리프트에서 떨어져 사망한 뉴스를 봤다. 시간 지나면 좋아질 거라는 나의 한가로운 선의와 무심함이 지하철을 멈춘 건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상래 형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지하철은 10분, 20분 멈추었지만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도 멈추어 있다.' 73년생 상래 형은 지난 50년간 멈추어진 삶을 견뎠다. 그의 삶이 움직일 때 우리의 삶도 움직이는 '불편한 연대'가 상식이 되기를 바란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