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장애 운동 대모 "이동권 문제, 당신의 내일일 수도"

입력
2022.04.12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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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장애인 권리 행정가 지낸 주디스 휴먼
장애 당사자로 세계은행 초대 장애·개발 담당 고문
이준석 장애인단체 비판 관련 "지도자, 통합 말해야"
"돌본다(care) 표현, 장애인은 참여 불능 의미로 들려"
"'장애는 비극적' 인식에 동의 못 해"

장애 당사자로 클린턴·오바마 미 행정부에서 최고위직 장애 권리 행정가로 일한 주디스 휴먼은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인생 목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장애 당사자로 클린턴·오바마 미 행정부에서 최고위직 장애 권리 행정가로 일한 주디스 휴먼은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인생 목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많은 이가 제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면서 '장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삶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라고 항상 물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을 기대하는 것이 제 인생의 주된 목표가 될 수는 없겠죠. 또 오랜 시간 차별에 맞서 싸워 온 것은 장애인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미국의 장애 운동가로, 클린턴·오바마 행정부 최고위직 장애인 권리 행정가로도 일한 '미국 장애 운동의 대모' 주디스 휴먼(74)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애를 개인의 비극으로 그리는 것을 경계했다. 생후 18개월에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그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돌파하는 데 일생을 바쳐 왔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장애인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힘써 온 그의 삶을 담은 자서전 '나는, 휴먼'(사계절 발행)이 지난달 국내에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그는 장애인 차별을 인종·성별을 이유로 차별받는 것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면서 "다양한 인권·시민 단체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국내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정치권 공방으로 번진 가운데 지난 5일 화상(줌·Zoom)으로 만난 휴먼은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못하다는 낙인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주디스 휴먼이 5일 미국 워싱턴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화상으로 인터뷰하고 있다. 휴먼은 장애인이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부모가 함께 싸우며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싸움으로 어떤 진전을 이뤄내고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며 부모의 역할을 강조했다. 줌 캡처

주디스 휴먼이 5일 미국 워싱턴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화상으로 인터뷰하고 있다. 휴먼은 장애인이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부모가 함께 싸우며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싸움으로 어떤 진전을 이뤄내고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며 부모의 역할을 강조했다. 줌 캡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와 같은 대중교통 점거 방식의 시위는 휴먼에게도 낯설지 않다. 1980년대 미국 '대중교통 접근권을 위한 미국장애인협회(ADAPT)'도 버스 점거 방식의 시위를 했다. 그가 직접 이끈 시위도 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활법 개정안 서명 거부에 항의하며 뉴욕 맨해튼 번화가인 매디슨애비뉴 네 개 차선을 휠체어로 막는 시위를 벌였다. 그는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한국 지하철 시위가 전장연만의 문제로 조명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1980년 이후 장애 운동뿐 아니라 여권 신장, 인종 차별 문제 등 모든 종류의 인권 운동이 '민권과 인권 리더십 콘퍼런스(The Leadership Conference on Civil and Human Rights)'라는 단체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며 "왜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하는 데 다양한 시민단체의 협력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장애인은 대중교통 접근권 논의가 불필요한 문제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고령화 사회인 한국에서 이는 바로 당신의 내일의 문제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디스 휴먼이 2018년 3월 장애 인권 운동에 관한 테드 강연을 하고 있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주디스 휴먼이 2018년 3월 장애 인권 운동에 관한 테드 강연을 하고 있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휴먼은 지하철 시위를 주도한 전장연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간 갈등에 대해서는 "한국 상황을 정확히 몰라 조심스럽다"면서도 "반대 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민주주의에서 정치 지도자가 통합이 아닌 분열로 이끄는 부정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물론 휴먼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한 차별적 시대를 겪었다. 그는 대통령이 장애인 기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한 이 시기에 대해 "인권단체를 더 조직화하고, 투표를 독려하며 관련 입법을 이끌어 내는 데 힘을 모았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19년 하반신 마비 뮤지컬 배우가 토니상을 받은 데 이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청각 장애인 배우가 수상하는 등 장애를 바라보는 미디어 콘텐츠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휴먼은 "장애를 다루는 방식이 진전되고 있고 고무적이지만 지난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가 발간한 '미디어 다양성' 보고서는 장애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의 장애 운동에 대해 연대의 중요성과 함께 "오늘의 장애인뿐 아닌 언제, 어디선가 발생할지 모르는 '내일의 장애인'을 위해서도 중요한 활동임을 대중에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는 '돌본다(care)'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요. 장애인의 시각에서 마치 제가 스스로 이 사회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거든요. 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장애를 비극으로만 그리죠.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휴먼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사계절출판사 발행
336쪽
1만7,000원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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