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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불량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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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나는 불량 엄마야.” 2년 전 학부모 대열에 합류한 친구 A가 뜬금없이 자아비판을 쏟아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돌봄 공백이 잦아지면서 ‘이모님’과 회사에 “죄송한데…”로 말을 시작하는 게 일상이 됐다는 자조적 성찰과 함께다.
나도 거들었다. “야, 불량 엄마 갑(甲) 오브 갑은 나지. 핏덩이 때부터 엄마 아빠한테 맡겨뒀으니까. 매일 할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니까 유치원 친구가 물어봤대. XX이는 엄마가 없냐고.”
‘최악 부모 설전’은 A의 “그래도 비빌 언덕(부모님)이 있으면 운 좋은 편”이라는 일갈과 “초등학생 때는 두 배로 괴로울걸?”이라는 경고에 입 닫은 나의 완패로 끝났다. 조용히 앉아 있던 미혼 B의 한마디, “듣기만 해도 피곤해, 그냥 결혼 안 할래.”
A의 예고는 현실이 됐다. 올해 ‘초딩’이 된 아이의 작은 사회는 40㎞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엄마를 수시로 불러댄다. “어머니, 오늘 반에서 XX이만 코로나19 진단 체크가 안 됐어요” “수업시간 변경 확인해주세요” “버스 기다리는데 언제 나오나요”란 연락은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일상이다. 학교 선생님이 “교통 지도 봉사 부탁한다. 자원해달라”며 엄마 20여 명을 대화방에 초대한 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학부모 상담에서는 ‘묵직한 한 방’도 이어졌다. 선생님은 아이가 느리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밖에 나갈 때도 오래 걸린단다. 이어진 진단은 예상 밖이었다. “(돌봄을 담당하는) 할머니보다 엄마가 평소에 더 시간을 보내주면 나아질 것 같아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조언이리라. 그러나 옹졸한 엄마는 “고작 네 커리어 따위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아이를 망치느냐”고 곡해하며 나홀로 울분을 토하고야 말았다.
①부정(양육방식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성격 탓 아닌가!)→②분노(아이 아빠 번호도 적었는데 왜 나한테만 연락하는가!)→③타협(묵혀둔 육아휴직을 써야 하는 것인가)까지 이르렀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지난 7년간 ‘부모를 대신 갈아 넣고 육아를 외면했던’ 대가가 쓰나미처럼 몰려와 덮쳤다는 자책만이 남았을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 시절 언급한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언뜻 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면전에 두고 “회사를 그만두고 애나 돌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빠르게 바뀌는 세상 속에서도 ‘육아=엄마 몫’이란 산업시대 성별 분업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젊은 엄마들을 괴롭히고 있다. 젊은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 동참하지만 선생님은 엄마 대신 아빠에게 평일에 시간을 더 내줬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지 않으니 말이다.
홀로 돌봄을 떠안게 된 여성은 자신을 갉아먹는다. 일ㆍ가정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 종국에는 노동시장 밖으로 튀어나가는 사연은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여전히 사회 전체에 구조적 성차별이 공기처럼 존재하는데, 모든 걸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엄마는 시스템이 만든 ‘불량품’이 돼 버린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뒷이야기. A는 결국 지난해 12년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경력단절여성의 길을 선택했다. 비혼ㆍ비출산을 선언했던 B는 갓난아기 독박육아 중이다. 부모를 희생시켜 일터에 나섰던 나는 이제 내 커리어를 희생해 아이를 돌봐야 하나 고민 중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2022년 유토피아 대한민국의 디스토피아적 결말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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