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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봉쇄 속 손목 골절 아이 위한 '특별 치료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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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글은 방역조치가 엄격했던 코로나19 초기에 일어났던 일을 적은 것입니다.)
오늘도 콜센터를 통해 어김없이 전화가 울린다. 외래진료를 왔다가 호흡기 증상과 열이 있어 외래 통제소에서 선별진료소로 안내받은 환자들의 문의 전화이다. 외래진료는 코로나19 증상과 무관해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열만 나는데 왜 진료를 못 받게 하느냐’ ‘감기라 목만 아픈 건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 ‘콧물만 나는데 환자를 거부하는 것이냐’ 등등 항의가 빗발친다.
계속된 문의 전화로 지쳐 있을 때쯤 또 한 통의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환자 보호자로부터 온 전화다. 현재 외래 치료 중이지만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자가격리 대상이 되는 바람에 진료를 올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문제는 그 환자가 손목 골절로 외부고정 수술을 받은 어린아이란 사실이었다. 아이는 금속핀 3개가 손목 외부로 노출되어 있어 드레싱을 계속하지 않으면 감염 위험이 큰 상황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에 금속핀이 박혀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태에서 병원도 가기 힘들게 되었으니, 엄마 마음은 타들어갔을 것이다. 통화 내내 내 마음도 막막했다.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 이러다 감염이 되면 어떡해요, 뼈는 잘 고정되어 있을까요, 혹시 뼈가 틀어지지는 않았겠죠, 우리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죠...”
전화기 뒤로 들려오는 엄마의 음성에서 애절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확진자가 아니잖아요”라는 말에 내 가슴은 한번 더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금속핀이 박힌 아이의 팔도 자꾸 어른거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자가격리면 모든 게 멈춰야 하는 줄 알았다. 보호자에게 잠시 뒤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내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선 관할 보건소와 감염관리실에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자가격리자라도 치료 목적의 진료는 방역지침 준수하에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진료는 가능했다! 하지만 많은 환자가 오가는 외래에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응급진료는 응급실에서 응급 코로나 검사를 시행 후 받을 수 있지만 코로나19 초기 시절에는 달랐다. 외래에서 치료해야 하는 자가격리 대상자는 음압치료실 내에서 타 환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응급실과 협조해 환자가 가장 적은 시간대를 정한 다음, 해당과 의료진이 대기하고 환자가 내원하면 진료를 진행했다. 하지만 호흡기 증상과 열이 발생하는 환자와 중증도가 높은 환자를 진료하는 응급실은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인산인해여서, 코로나 확산세가 심해진 뒤론 더 이상 응급실에 외래 환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다른 방도를 고민해야 했다. 감염관리실(병원마다 설치된 코로나진료 컨트롤타워)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병원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모두들 극도의 긴장 속에서 근무하고 있던 터라,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교수님에게 아이 상황을 설명드렸고,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우리 계획은 외래진료가 모두 끝나고 환자가 없는 시간에 아이 진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외래 진료가 끝나자, 드레싱 및 치료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상의학과에 요청, 아이만을 위해 준비된 촬영실에서 골절된 손을 촬영했다. 진료실에서는 의료진들이 4종 보호구를 착용한 후 진료를 진행하였다. 보호구로 감싸인 우리의 모습을 본 아이는 겁을 잔뜩 먹었고, 자신의 손에서 거즈를 한 장 한 장 벗길 때마다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술부위는 깨끗했고 영상으로 보이는 뼈도 잘 붙어가고 있었다.
소독하는 동안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무섭고 두려워 울었고, 옆에 있던 엄마는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울었을 것이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한 명의 환자였을 텐데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진료가 무사히 끝나자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료를 마친 아이의 손에 잘했다며 막대사탕을 쥐여주시던 교수님의 미소를 보고 비로소 어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어머니는 연신 감사하다고 했고, 우리들도 그제서야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렇게 그 아이의 '드레싱 작전'은 잘 마무리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엄마는 우리에게 전화를 줬고, 우리 의료진은 한마음으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결국 아이를 치료했다.
코로나19가 벌써 3년째다. 가슴 아픈 장면, 화나는 장면이 많았고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치료했던 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너무도 많은 것을 잃게 만든 코로나19이지만, 우리의 이해와 배려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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