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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해독제'로 세상을 치료한 의사

입력
2022.04.04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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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E. Farmer(1959.10.26~ 2022.2.21)

의사 겸 공중보건 전문가 폴 파머는 하버드 의대 재학 중이던 1987년 아이티 현지에 자선의료기관 PIH를 설립, 숨질 때까지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의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다. 그는 문명사회라면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만큼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가진 자들이 조금만 희생하면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서로 기대는 것 외엔 지속가능한 그 어떠한 해법도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duke.edu

의사 겸 공중보건 전문가 폴 파머는 하버드 의대 재학 중이던 1987년 아이티 현지에 자선의료기관 PIH를 설립, 숨질 때까지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의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다. 그는 문명사회라면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만큼은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가진 자들이 조금만 희생하면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서로 기대는 것 외엔 지속가능한 그 어떠한 해법도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duke.edu

미국 감염내과 의사 폴 파머(Paul Edward Farmer)는, 가난이 사람을 죽이는 사회를 가장 후진 사회라 여겼다. 의료인류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공공의료의 수준으로 공동체의 품위와 수준을 판단했다. 가난이 병을 만들고 돈이 없어 처방과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회는 천박하고 열등한 사회였고, 목숨을 상거래의 저울에 내맡기는 법과 제도는 구조적 폭력이고 범죄였다. 자신의 조국 미국을 비롯한 인류 대다수 문명 국가가 대체로 그러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중미 아이티 고원의 캉주(Cange)라는 작은 마을을 거점 삼아, 일류공공의료 공동체를 구축하고 그게 가능하다는 걸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유엔 기구와 국제 재단, 선량한 부자들을 설득해 병원을 짓고 진료했고, 학교를 세워 공중보건 전문가를 양성했고, 그 모델을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들로 확장했다. '절망의 해독제(antidote to despair)'라 불리는, 세계 굴지의 비영리 민간의료네트워크 'Partners In Health(PIH)'가 그렇게 탄생했다.
PIH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되고도 돈이 없어 AIDS로 숨져가던 르완다 등지의 환자를 위해 제약회사를 압박해 약을 공급받았고, 비용 대비 효과가 적다며 뒷짐만 지고 있던 세계보건기구(WHO)를 설득해 페루의 가난한 다제내성결핵(MDR TB) 환자들을 80%라는 기록적 완치율로 치료해 보이기도 했다. 현재 르완다의 만 13세 여성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접종률이 미국보다 높은 것도 파머와 PIH 활동가들 덕이다.
하지만 파머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아이티에만 16개에 이르는 첨단 클리닉과 세계 1만 7,000여 명의 PIH 종사자, 그들이 구해낸 수많은 목숨들이 아니라, 질병-치료의 구조적 빈부격차와 비용-효과의 차별적 공공의료 시스템을 세상에 알리고 극복 모델을 제시한 거였다. "세상을 치료한 의사" 폴 파머가 별세했다. 향년 62세.

캠핑카 떠돌이 일가의 낭만적 가난

폴 파머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애덤스(North Adams)에서 태어나, 유별난 부모 탓에 캠핑카와 요트에 살며 앨라배마 평원과 플로리다 해안 습지를 떠돌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낡은 스쿨버스 캠핑카에 6남매 대가족을 싣고 각지를 떠돌다 한 곳이 마음에 들면 차(또는 요트)를 세우고 임시교사 일자리를 찾곤 했고, 구직이 여의치 않으면 농장 잡일도 마다치 않았다. 방학 때면 아이들도 노동에 가담해야 했다. 파머가 아이티 이주노동자의 가난을 처음 경험한 것도, 12세 무렵 플로리다의 한 오렌지 농장에서였다. 파머 일가도 당연히 가난했지만, 파머 남매는 가난을 몰랐다. 그들에게 가난은 흥미진진한 모험의 일부였다.
아버지는 삶의 모든 면에 자신만만했고, 나름의 방식으로 무척 성실한 가장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파머에게 "아버지에게 뭘 못한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때까지 그 일에만 매달릴 테니까"라고 조언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들도 자기처럼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길 원했다. 5학년이던 파머가 학교에서 파충류 클럽을 만들었는데 가입자가 아무도 없어 풀 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족 전원을 식탁에 불러모은 뒤 파머의 파충류 강의를 듣게 했다. 건장한 체구에 만능 스포츠맨이던 아버지는 만 49세에 농구 시합 도중 별세했다.
파머는 아버지나 형제들과 달리 비쩍 마른 체구에 운동에 젬병인 대신 공부에 능했고, 아버지의 집념 DNA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11살 때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고 홀딱 빠져선 공공도서관 사서에게 "이런 책을 또 골라 달라"고 청했더니 판타지-모험 소설을 빌려줬다고 한다. 그는 그 책들을 읽고는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말했고, 오랜 탐색 끝에 그가 고른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다. 그가 원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 즉 선-악의 탐구와 대결 서사였다.

그는 플로리다 브룩스빌의 에르난도(Hernando)고교 학생회장을 거쳐 장학생으로 듀크대에 진학, 기숙사 룸메이트가 푸는 짐에서 비닐 커버에 싸인 셔츠를 처음 보고는 제유적으로 부를 경험했다고 한다.

가난은 83년 하버드 의대 재학 시절 성당 부속 창고에 살면서, 캠퍼스 인근 이주노동자 캠프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 구체성을 절감했다. 아이티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한 것도 하버드 의대에 진학한 해부터였다. 그는 아이티와 보스턴을 오가며 의료인류학과 감염질환을 전공해 90년 학위(MD, PhD)를 땄다. 그가 보스턴의 중견 건설업자 겸 자선가 톰 화이트(Tom White)의 기부금으로 지인들과 함께 캉주 현지에 PIH를 설립한 것은 졸업도 하기 전인 1987년이었다. 그는 돈만 댈 게 아니라 실상을 먼저 봐야 한다며 화이트를 아이티 현지까지 오게 했고, 화이트의 기부는 근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병원-보건소는커녕 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현지 봉사자와 훗날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하버드대 동창 김용(Jim Yong Kim) 등과 함께 시작한 그 프로젝트는 현재 아이티에만 16개 클리닉에 직원 약 7,000명에 이르는 거대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진료비는 거의 무료이고 입원비도 하루 1.5달러. 아이티 대지진 직후인 2013년, 수도 포르토프랭스 북쪽 미르발레(Mirebalais)에 대학병원도 설립했다. 현지인에 한해 학비도 사실상 무료. 90년대부터는 내전 참상을 겪은 아프리카 르완다에 진출했고, 2018년 르완다 정부와 함께 보건-의료학교를 설립했다. 근년의 PIH는 중남미(아이티, 과테말라, 페루, 멕시코) 아프리카(르완다 말라위 레소토), 러시아 시베리아 수감 시설과 미국 빈민지역 등에서 활동하며, AIDS와 결핵, 장티푸스, 2014년 서아프리카를 강타한 에볼라 집단감염사태 등에도 선도적으로 대응해왔다.

국제 비영리 의료네트워크인 PIH는 여느 자선의료기관과 달리 최신 첨단의료서비스를 지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부에 따라 목숨의 값어치가 달라질 순 없다는 철학, 빈자 우선이라는 해방신학 신앙에 따른 거였다. PIH 사진.

국제 비영리 의료네트워크인 PIH는 여느 자선의료기관과 달리 최신 첨단의료서비스를 지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부에 따라 목숨의 값어치가 달라질 순 없다는 철학, 빈자 우선이라는 해방신학 신앙에 따른 거였다. PIH 사진.

PIH 병원들은 '공익 자선병원= 싸구려'라는 선입견 혹은 국제 공공의료의 차별적 모델에 저항하듯, 첨단 의료장비와 인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비용-효과의 저울질 혹은 지속 가능성 등을 들어 PIH 방식을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파머는 의료-생명에 관한 한 차별은 없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 원칙은 엘살바도르 독재에 저항한 오스카르 로메로 주교, 해방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페루 신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신앙에 근거한 거였다. 빈자 우선의 원칙(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빈부·인종·젠더 차별 등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저항, 병자 등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과의 동행(Accompaniment). 그는 해방신학의 저 신앙적 원칙을 인도의 요가나 불교의 명상처럼 종교의 세속적 실천이자 삶의 철학으로 여겼다.

특히 세 번째 원칙, 병자와의 동행은 PIH를 여느 의료봉사NGO 활동과 구분짓는 원칙이었다. 1988년 캉주에서 결핵 환자 세 명이 뜻밖에 숨지는 일이 생겼다. 영양 결핍과 식수가 원인이었다. 파머는 훈련된 공공의료 스태프를 파견, 환자들과 더불어 지내며 투병-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을 갖추게 하고 보건 교육을 시행하게 했다. PIH의 동행-동반 원칙이 그렇게 시작됐다. 장티푸스가 유행하면 백신-항생제 처방과 더불어 상수도원을 점검하고, 우기의 사망률이 높은 마을에는 병원과 마을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 게 PIH의 일이었다. 파머는 형식적 단기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근원적 처방을 추구했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가려진 진실

1989년 워싱턴D.C에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미국이 경악한 일이 있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리처드 프레스턴은 방대한 취재를 거쳐 5년 뒤 논픽션 '핫 존(Hot Zone)'을 출간했다. 에볼라의 역사와 바이러스의 실체, 가공할 증상과 의료진의 사투를 "SF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도 과학적으로(...) 섬뜩하"게 담은 그 책은 무려 32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2020년 파머는 '열병, 불화, 그리고 다이아몬드(Fevers, Feuds and Diamonds)'란 책을 썼다. 그는 '핫 존'에 묘사된 것처럼 에볼라 바이러스가 그렇게 무자비한 킬러는 아니며 "똑같이 감염된 미국인과 유럽인은 거의 전원 회복됐다"는 가려진 진실을 공개했다.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장기들이 녹아 드는 등 증상 대부분이 구토나 설사로 인한 수분-전해질 부족에 기인한 것이어서 적절한 조치와 치료를 받으면 호전된다며 "2014년 아프리카 서부를 유린한 에볼라의 치명성은 바이러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라이베리아나 시에라리온의 기초 의료시스템의 결여 때문"이라고 썼다. 나아가 그는 500년 노예 무역 역사에서부터 목재, 라텍스, 황금과 다이아몬드 등 천연 광물 착취라는 근년의 역사가 그 참상의 뿌리에 닿아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하며, 감염 질병이 발생하면 담장부터 둘러치는 선진국들의 '통제-봉쇄 처방(control-over-care)'의 제국-식민지적 발상도 비판했다. 그리고 루이 파스퇴르가 유언처럼 남긴 말- "관건은 미생물이 아니라 지역(terrain)"-을 인용하며, 그가 말한 '지역'이란 좁게는 인체(면역 시스템)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선 생물학을 넘어선 정치라고, "폭력적 갈등과 물질적 불평등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적자생존의 장구한 진화론적 원인에 기인한 불가피한 죽음이 아니라, 그들을 미생물에 취약하게 만든 지금 역사의 결과다."

그는 하버드의대와 보스턴 브리검여성병원 교수로 재직하며, PIH 현지 병원 진료와 공중보건 프로젝트도 병행했다. 그런 탓에 그가 머무는 곳은 진료실 아니면 비행기 기내였고, 그의 평전 '산 넘어 산 Mountains Beyond Mountains(2003)'을 쓴 트레이시 키더(Tracy Kidder)가 책을 쓰려고 그를 인터뷰한 것도 대부분 이동 중인 기내에서였다. 키더는 "파머는 하루 한두 시간 넘게 잠을 잔 적이 없을 것"이라며 "과장없이 말하건대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라 평했다.

후원금의 95%를 PIH 사업예산으로

PIH 예산은 전액 후원-기부금으로 충당됐고, 돈을 모으는 것도 주로 파머의 일이었다. 캉주에서 진료소를 처음 열던 무렵 현미경 살 돈이 없어 하버드 의대에서 훔쳐올 정도였던 그의 집요함은 제약회사나 국제기관 관계자, 부유한 대학 동창 등 후원자들 앞에서도 그대로 발휘되곤 했다. 가디언 기자는 "편안한 이들을 괴롭혀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그 어려운 일을 PIH는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썼다. 파머는 두 대학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받던 급여 내역을 확인하는 법이 없었다. 회계사가 월급을 받아 신용카드 대금 등을 결제하고 남는 돈 전액을 PIH 통장으로 입금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신용카드 한도 초과로 결제가 안돼 급히 전화를 걸었더니 회계사가 '당신만큼 성실한 파산자는 처음 본다'고 말하더라는 일화가 있다. PIH는 그렇게 모은 돈의 95%를 사업 예산, 즉 가난한 병자를 위해 썼다.

PIH 병원 네트워크 직원 1만 7,000여 명의 99%는 현지에서 PIH대학이 양성한 이들이다. 그들은 환자들이 사는 마을에 파견 가서 질병의 원인이 되는 환경에까지 중장기적으로 개입해 돕는 일을 한다. PIH 사진.

PIH 병원 네트워크 직원 1만 7,000여 명의 99%는 현지에서 PIH대학이 양성한 이들이다. 그들은 환자들이 사는 마을에 파견 가서 질병의 원인이 되는 환경에까지 중장기적으로 개입해 돕는 일을 한다. PIH 사진.


사우스캐롤라이나 교인 모금 행사와 쿠바 AIDS 학회, 모스크바 방문 등 그의 한 달여 일정을 동행한 키더는 파머의 출장 가방이 후원자나 환자 등에게 줄 자잘한 선물로 가득 차서 정작 그가 입을 옷은 셔츠 3벌이 전부였다고, 파머는 볼펜 잉크가 묻어도 표가 안 나는 검은색 단벌 수트를 입고 비행기에서 자고 다음날 곧장 모임에 나가곤 했다고 전했다. 바지 지퍼가 고장 나서 코트 버튼을 잠그고 강의 연단에 선 적도 있었다. 주요 후원자인 멜린다-빌게이츠 재단의 빌 게이츠가 르완다에서 파머와 공식 일정을 마친 뒤 인근 산악지역 고릴라를 보러 가자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파머는 회의 때 입은 수트 차림 그대로 약속장소에 나타났다고 한다. 빌 게이츠는 "안개 자욱한 가파른 언덕을 양복에 타이까지 맨 채 오르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그 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한 칼럼에 썼다. 물론 어려움도 적잖았을 것이다. 파머는 "PIH의 주요 후원그룹인 '백인 리버럴'들을 죽도록 사랑한다"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와 PIH의 저 투명한 윤리성도, 후원자들의 존경심에 가까운 신뢰와 PIH의 대담한 실험을 성공시킨 비결이었다. 파머는 PIH 혁신의 비결은 환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묻고 부족한 걸 채워주려는 데서 비롯됐다고, "진정한 혁신은, 때로는 하찮고 뻔한 일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것 말곤
그 어떤 지속가능한 해법도 없다

폴 파머의 말

파머는 환자 및 직원들과 친구처럼 지냈고, 출장 갈 때면 '전동 칫솔을 사다 달라'는 등의 심부름도 곧잘 맡아 해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말기환자 생일을 기억해 출장 중 꽃다발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고, 골수암을 앓던 21세 축구팬 환자를 위해 친지들을 초대해 함께 리버풀 경기를 관전하는 파티를 주선하기도 했다. PIH 이사 로리 누엘(Laurie Nuell)에 따르면 파머는 아이티 아이들 100여 명의 대부였다. 라이베리아 PIH 병원 운전기사 바니 카마라(Varney Kamara)가 파머와 동행해 라이베리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어렵고 중요한 자리에서 갑자기 그의 휴대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당황한 그에게 파머가 "카마라! 그 착신음 내 폰에도 깔아줄래?'라고 했다"는 이야기. 파머를 태우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환자 중에 이발할 줄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묻더니 곧장 이발을 부탁하더라는 일화를 전했다.

파머는 여러 권의 책과 논문을 썼고, 2020년 베르그루엔 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고, 여성 교육지원단체인 'Women and Girls Initiative'를 설립해 이끈 아이티 여성 디디 베르트랑(Didi Bertrand)과 96년 결혼해 2녀 1남을 두었다.
그는 강의차 머물던 르완다 부타로에서 급성심장질환으로 숨졌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애도의 글을 남겼고, 라이베리아 PIH 병원 운전기사 비비언 탈리(Vivian Tarley)도 짧은 글을 썼다. 파머가 자기 병원에 여성 운전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고, 그가 선물한 컴퓨터를 익혀 웬만큼 쓸 줄 알게 됐다는 사연.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화로 듣곤 "눈물이 쏟아져 갓길에 차를 세워야 했다"고, "내달 라이베리아에 오면 마중 나가길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썼다.

해방신학의 세 원칙을 지탱한 그의 단 하나의 신념을 꼽으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것 말곤 그 어떤 지속가능한 해법도 없다'는 거였다. PIH 모델의 미래를 의심하는 이들에게 그가 남기고자 한 말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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