껑충한 외모의 '영화 사랑꾼'… 유지태는 여전히 진중했다

입력
2022.04.01 07: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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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여러 영화 속 유지태의 모습.

여러 영화 속 유지태의 모습.

맥주 광고였다. 한 청년이 웃음을 작렬시켰다. 배경으로 나온 폭포보다 더 청량했다. 감질났다. 밤늦게 TV를 보다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고 싶었다. 모델은 전통적인 조각미남은 아니었다. 껑충한 외모에 웃음이 눈부셨다. 신인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호감도만으로도 큰 별이 될 만했다. 배우 유지태에 대한 첫인상이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볼 때만 해도 배우보다는 모델 이미지가 강했다. 그가 맡은 ‘페인트’ 역은 딱히 복합적인 심리를 담아낼 필요는 없는 듯했으니까. 페인트는 한 주유소를 습격한 자신의 패거리들과 다를 바 없이 과하게 소리 지르고, 지나치다 싶게 몸을 움직인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봄날은 간다’(2001)로 유지태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외형이 멋진 모델이 아닌, 누군가의 상실의 감정을 온전히 스크린에 새기는 이가 됐다. 유지태의 이름을 해외에 알린 ‘올드보이’(2003)는 말해 무엇하랴.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앓이를 하는 상우(유지태)의 모습은 영화팬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앓이를 하는 상우(유지태)의 모습은 영화팬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유지태의 이미지를 제대로 활용한 첫 영화는 ‘야수’(2006)라고 생각한다. 권상우와 호흡을 맞춘 영화다. 권상우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형사 장도영을 연기했다. 유지태가 맡은 검사 오진우는 장도영과 정반대 인물이다. 정의에 대해서는 장도영과 마음을 함께하나 접근방식은 다르다. 장도영이 불이라면 오진우는 얼음이다. 장도영의 다혈질은 오진우의 냉혈 기질과 대조를 이루며 두드러진다. 권상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다. ‘야수’ 이후 유지태는 검사 역을 자주 맡는다.

유지태는 냉정하면서도 이지적인 인상이 뚜렷하다. 선한 역을 맡아도, 악역을 연기해도 변주하기 좋은 이미지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빈 병으로 누군가의 손을 망가뜨릴 때(영화 ‘뚝방전설’), 낮은 목소리로 “오대수는요, 말이 너무 많아요”(‘올드보이’)라고 힐난할 때 스크린에는 한기가 돈다. tvN 드라마 ‘굿와이프’(2016) 속 이태준의 면모도 마찬가지다. 엘리트 검사로 살다 추락 위기에 놓인 후 아내 김혜경(전도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고도 그는 변하지 않는다. 김혜경에게 냉담한, 차가운 이기주의자의 모습에 기이하게도 마음이 간다.

유지태는 영화 '야수'에서 검사 오진우를 연기한 후 '가을로'와 '꾼' 등에서도 검사 역할을 맡았다. 쇼박스 제공

유지태는 영화 '야수'에서 검사 오진우를 연기한 후 '가을로'와 '꾼' 등에서도 검사 역할을 맡았다. 쇼박스 제공

진지하고 냉철한 면모를 지녔으니 웃음기와는 거리가 멀고도 멀다. 코미디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는 어렵다. 스크린 밖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지하고 학구적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과 취향과 이미지를 잘 안다. 영화 ‘가을로’(2006)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그는 “박찬욱 감독님도 제가 너무 진지해서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는 스타가 된 후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올랐고, 학업을 이어갔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박사과정을 밟았다. 단편영화를 여러 편 연출했고, ‘마이 라띠마’(2013)로 장편영화 감독이 됐다.

지난달 25일 오후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봤다. 서울 중구 정동에서 열린 서울아트시네마 재개관 행사에서였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사설 시네마테크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영상자료를 수집하는 곳이다. 영화마니아들의 안식처이자 학습소인 이곳은 종로구 서울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최근 둥지를 옮겼다. 고전이나 예술을 다루는 여느 단체처럼 서울아트시네마의 살림살이는 빠듯하다. 갑작스러운 이전으로 금전적인 곤란에 처했을 때 유지태가 손을 내밀었다. 절친인 개그맨 김준호, 또 다른 지인들과 함께 후원에 나서 낡은 좌석 200여 석을 교체했다. 이날 행사에서 유지태는 “극장에 와서 실제로 (영화를) 경험하고 다른 사람의 영화를 배워야 성숙한 감독이나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 배우가 되려면 진짜 체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지식하게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진중한 그다운 언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태는 올해 공개될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서 인질강도극을 주도하는 지능범 역할을 맡았다. 넷플릭스 제공

유지태는 올해 공개될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서 인질강도극을 주도하는 지능범 역할을 맡았다. 넷플릭스 제공

유지태는 올해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스페인 인기 시리즈 ‘종이의 집’을 한국식으로 새롭게 만든 드라마다. 유지태는 ‘교수’를 연기한다. 기상천외한 인질 강도극을 설계하고 지휘하는 인물이다. 대범하면서도 냉철하고 지력이 높다. 악하나 미워할 수 없는 역할이다. 오랜만의 복귀가 가장 그다운 모습이어서 기대가 크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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