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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예능 선수'가 되었나

입력
2022.03.31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3월 29일 첫 방송을 시작한 야구 예능 '빽 투 더 그라운드'의 출연진. MBN 제공

3월 29일 첫 방송을 시작한 야구 예능 '빽 투 더 그라운드'의 출연진. MBN 제공

요즘 TV를 켜면 운동선수 한두 명쯤 포함 안 된 예능이 없다. 포맷도 다양해졌다. '아마추어 운동팀의 좌충우돌 성장기'라는 전형적인 설정에서 벗어나 은퇴 선수들에게 다시 유니폼을 입혀 추억을 소환하는 콘셉트나 경기장 밖에서 궁금했던 사생활을 담은 관찰 예능도 인기다. 지상파 3사를 필두로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TV, 유튜브까지 수많은 채널과 플랫폼에서 스포츠 스타 모시기 경쟁이 뜨겁다.

수요가 늘다 보니 서장훈과 안정환으로 대표되던 '인기 종목의 빅 스타'라는 출연 장벽도 허물어졌다. 축구 야구 농구부터 배드민턴 탁구 컬링에 이르기까지 인기ㆍ비인기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의 새 얼굴이 등장한다. 현역 시절 인터뷰 한번 하기 어려웠던 과묵한 선수들이 TV에 나와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 배신감마저 들 때도 있다.

그들이 '예능 선수'로 변신한 이유는 뭘까. 선수들의 최종 꿈은 감독이 되는 것이고, 코치 입문은 통과의례처럼 여겨졌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방송가에 모인 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서장훈은 지난 2015년 방송 활동을 시작하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서'라고 했다. 선수 시절 '싸움닭'으로 비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했다. 안정환도 조각 같은 외모와 신비주의에 가려졌던 의외의 입담과 친근한 모습으로 인간미를 자아냈다.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지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선수로는 최고였지만 리더로는 스스로 자질이 없다고 생각해 제2의 인생을 개척하는 부류도 있다. 박용택은 "야구가 즐거웠던 적이 없다. 예능이 진짜 내 모습"이라며 야구팬에겐 다소 충격적인 고백도 했다.

'농구대통령' 허재, '골프여제' 박세리, '코리안특급' 박찬호, '홈런왕' 이승엽도 일맥상통한 이유일 것이다. 지도자에 뜻이 없거나 시기상의 문제로 여의치 않다면 차라리 인지도를 활용한 방송 출연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법도 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있다.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한 각 종목의 레전드들이다.

최근의 스포츠 예능 붐에 편승한 이들의 경우는 좀 달라 보인다. 은퇴 직후 방송에 활발하게 출연 중인 스포츠 스타 A에게 지도자 데뷔 의향을 묻자 "시켜줘도 안 하겠다"는 냉소적인 답이 돌아왔다. 안타를 치고 나간 선수의 장갑을 받아주고 배팅볼을 던져주는 궂은 일은 감수할 수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립지만 그들도 선수 때 누렸으니까. 박봉의 코치직에 미련이 없다는 거다. 슈퍼스타는 아니더라도 현역 시절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느끼는 박탈감과 경제적 타격은 크다. 코치 때부턴 무늬만 프로일 뿐 성과를 내도 연봉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 공무원처럼 매년 일률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이유로 경질돼도 할 말 없는 고용 불안까지. 코치직은 소신이나 열정을 펼치기보단 '연명'에 급급하게 만든다. 그래도 그 자리에 연연했던 건 돈보다 일자리 자체였다. 수요는 적은데 공급이 넘쳐나는 구조가 코치의 열악한 처우를 방치했다.

종목마다 차이는 있지만 프로스포츠 코치의 평균 초봉은 5,000만 원 정도다. A는 단 한 달 동안 각종 예능 출연으로만 그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귀띔했다. 영원한 갑일 줄 알았던 구단들의 코치 구인난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성환희 문화스포츠부 차장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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