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처음부터 풍수가 이용됐다

입력
2022.03.30 19:00
25면

편집자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바라본 청와대 모습. 뉴스1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바라본 청와대 모습. 뉴스1


청와대 터는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풍수(風水)가 이용됐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주산(主山)을 놓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결국 정도전의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을 향하여 다스렸으니 동향으로 도읍을 창설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북악산이 이겼다.

이후 우뚝 솟은 북악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삼고,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을 안산(案山)으로 두어 한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남면(南面)'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쪽의 낙산이 좌청룡(左靑龍),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됐다. 그리고 주산인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짓고 이를 기준으로 해 도성을 계획했다.

풍수에서 명당 주산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북악산의 기맥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수많은 지시가 기록돼 있다.

풍수에 따르면, 청와대 터는 북악산에서 경복궁 근정전을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경로에서 백두산 정기를 도성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내맥이 내려오는 길목으로서 풍수상 반드시 땅을 훼손치 말고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1927년 조선 제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현 청와대 자리에 관사를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식민 통치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경복궁 앞에는 총독 청사를 짓고, 뒤쪽에 관사를 지었다. 조선의 기를 누르고 용맥(龍脈)을 끊으면서 모욕을 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 이론')

해방 이후 이 관사는 미군정이 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꿨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었다. 현재의 청와대는 노태우 대통령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청와대 주인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재임 중에 탄핵을 당하거나 측근에 의해 살해당했다. 퇴임 후에는 구속됐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임 중에 자식들이 구속됐다.

청와대 첫 입주자 마코토 총독도 서울 도착 시작부터 강우규 열사에 의해 피로써 막을 열었다. 조선 총독을 한 번 더 역임한 그는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젊은 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청와대 첫 거주자부터 피로 막을 내린 것이다.

풍수를 믿든 안 믿든, 한 장소에서 계속해 불행이 나타나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말처럼, 공간이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 혹시라도 손바닥에 '왕(王)'자를 써서 '효험'을 봤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흉지(凶地)로 불리는 곳은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명분이 좋다. 구중궁궐로 불리던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 드리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한 장소 이전이다. 공약 실천의 의미도 있다. 게다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역사에도 최초로 기록된다.

풍수는 왕조시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오죽하면 풍수를 '불가신 불가폐(不可信 不可廢)'라 했겠는가. '믿을 수도 없지만, 없앨 수도 없다'는 뜻이다.

전형일 명리학자‧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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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일명리학자·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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