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주인 몰래 녹음, 주거침입죄 아니다… '초원복집' 판례 25년 만에 변경

입력
2022.03.24 18:18
수정
2022.03.24 20:4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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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의 평온 상태 침해됐다 할 수 없어"
주거침입죄 인정한 '초원복집'과는 다른 판단

대법원 청사. 연합뉴스

대법원 청사. 연합뉴스

식당 주인 허락없이 상대방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녹화한 행위를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왔다. 1997년 '초원복집 사건' 판결 당시 음식점 주인 몰래 도청 장치를 설치한 당시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에게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봤던 판례가 25년 만에 변경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4일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된 전남 광양시 소재 화물운송업체의 부사장인 A씨와 팀장 B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와 B씨는 회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쓴 기자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고 2015년 1~2월 4차례에 걸쳐 식당 주인 몰래 방 안에 녹음 장치를 설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기자의 협박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범행 장소가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장소라는 점에서 주거침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은 두 사람의 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도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음식점에 들어갔다면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들에게 각각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식당 주인 몰래 녹음 장치를 설치할 목적으로 들어갔더라도 A씨와 B씨가 음식점에 출입한 것 자체가 식당 주인의 의사에 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기자와의 대화를 녹음·녹화한 행위 역시 대화 당사자 몰래 녹음을 처벌하지 않는 통신비밀보호법의 취지에 따라 무죄로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두 사람을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A씨와 B씨의 몰래 녹음 행위로 식당 주인의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다수 의견(11명)의 대법관들은 "일반인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에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들어갔다면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다고 평가할 수 없다"며 "영업주가 실제 출입 목적(몰래 녹음)을 알았더라면 출입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더라도 주거침입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별개 의견을 낸 김재형 안철상 대법관은 "주거침입죄가 성립하는지 따질 때 거주자 의사에 반하는지를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역시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전원합의체 선고로 1997년 대법원 판결 이후 형법 교과서에도 실린 ‘초원복집 사건’ 판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대법원은 "음식점에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들어간 경우는 영업주의 의사에 반한다고 봐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던 '초원복집 사건' 등 같은 취지의 기존 판례들을 모두 변경한다"고 밝혔다.

초원복집 사건은 14대 대선을 앞둔 1992년 12월 정주영 후보가 이끄는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이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을 도청한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부산 남구 대연동의 음식점 초원복국에서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교육감, 부산지검장 등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김영삼 후보 당선을 위해 노력하자'며 지역감정 조장을 모의했다. "우리가 남이가"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이날 대화 내용은 통일국민당 측이 이후 언론에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당시 검찰은 도청에 관여한 당 관계자 3명을 주거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997년 대법원은 이들에게 유죄를 확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 해도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이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도청 장치를 설치할 목적으로 손님을 가장해 들어간 경우 영업주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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