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인생이 광야 같기에 이에 위안을 주고 깨우쳐 주는 책들이 서점가에는 인기다. 우리는 누군가가 인생을 잘 설명해 주길 바란다. 불확실하기에 당연히 불안하며, 당연히 답을 원한다. 찢기고 상처 입은 자에게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인생의 지도를 확실히 보고 싶듯이 신앙인도 하나님을 잘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을 알 수 있을까? 인생을 알 수 있을까?
성서는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확신 찬 조명을 한다. 특히 구약성서 시대에는 좋은 신심이 인생의 복락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를 사랑의 매로 여겼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2
누구든 긍정하는 바다. 인생의 쓴 경험은 미래를 위한 값진 자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을까?
성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터져 나온 탄식을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시 73:1-2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홀로코스트의 살육 아래 많은 유대인이 침묵하는 하나님을 저버리기도 했다. 눈앞에서 자기가 전도한 신앙인 가족이 끓는 물에 삶아지는 것을 보고 더는 버티지 못해 수도복을 벗은 선교사도 있었다.
이처럼 극단적이지 않아도 분명 회색 지대는 존재한다. 성경은 탄식을 지나 불가지론마저 인정한다. 인생을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 있게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지를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전도서 8:17
인생에 대한 확신과 회의, 이 두 전통은 성서 안에서 충돌하지만 사실 변증적이다. 이는 확신을 갖는 자만을 견제하고 이론으로만 인정되는 삶의 지혜를 벌거벗긴다. 인생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인간의 현실에 부적합하다. 이처럼 삶의 지혜는 지속해서 도전받고 수정된다. 신이 아니라 신에 대하여 말하는 인간의 모든 담론은 어느 것도 확실할 수 없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길 원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경고한다. 신이 인간에 의해 이해되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신은 인간의 지력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신비와 초월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의 회의주의는 하나님을 단순한 이해로부터 탈출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불가해성과 자유를 안전하게 지킨다.
성서의 지혜는 인생도 섣부른 공식에서 탈출시킨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
전도서 9:11-12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함부로 정의할 것이 아니며, 모른다고 좌절할 것도 아니다. 자유한 인생을 우리는 경외해야 할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