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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군대 가"란 말도 페미니즘입니다

입력
2022.03.2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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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당신에게]
<3회·끝>알고 보면, 당신도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처럼 해석 넓은 사상
어디나 있는 소수 분파 부각해 전체를 모욕
페미니즘 몰라, 혐오정책과 우대정책 혼동


2017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하루 앞두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Fearless Girl)’상. 당시 월가를 상징하는 황소상에 맞선 듯 등장한 이 소녀상은 큰 화제가 됐다. 소녀상 명패에는 “여성 리더십의 역량을 보라. 여성(SHE)이 차이를 만든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뉴욕=AP 연합뉴스

2017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하루 앞두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세워진 ‘두려움 없는 소녀(Fearless Girl)’상. 당시 월가를 상징하는 황소상에 맞선 듯 등장한 이 소녀상은 큰 화제가 됐다. 소녀상 명패에는 “여성 리더십의 역량을 보라. 여성(SHE)이 차이를 만든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뉴욕=AP 연합뉴스

"페미니즘은 성평등 이념에 입각해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여성참정권 운동가 위베르틴 오클레르, 1892년)

"여성을 해방한다는 것은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에 가둬놓기를 거부하되 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1949년)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더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다." (여성인권 운동가 리베카 솔닛, 2022년)

수백 년간 이어져 오며 여성 참정권 부여, 여성의 사회진출 독려, 그리고 남성의 가부장적인 의무까지 덜어내 온 페미니즘은 한국에서 지금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다.

"너 페미냐"라는 말을 욕처럼 내뱉는 이들이 넘치고, 페미니즘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려운 '볼드모트'(소설 해리포터 속 악역) 같은 취급을 당한다. 정치권에서조차 반(反) 페미니즘을 공공연히 외치며, "페미니즘은 싫지만 난 성평등주의자"라는 형용모순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일보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10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페미니즘'에서 '성평등'을 떼어 내려는 거대한 백래시 속에서, 페미니즘의 본질과 포용성에 대해 거듭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여성단체 회원들이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시청에서 대학로까지 행진하며 여성노동자 차별 금지 및 성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민주노총 조합원과 여성단체 회원들이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시청에서 대학로까지 행진하며 여성노동자 차별 금지 및 성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비(非) 페미' 10명에게 성인지력 검사해보니

10대부터 50대까지 나이, 성별, 하는 일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이거나 잘 모른다는 3명을 제외하고는 '여성 우월주의' '이기적인 집단' '남성혐오' 등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이 과거 성평등 의식을 측정하려 개발한 단축형 성인지력척도 검사 결과 10명 모두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이성관계, 사회문화영역에서 고르게 높은 성인지력을 보였다.

여성에게 얌전한 행동이나 옷차림을 강조하거나, 남자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사고에는 각각 90%와 70%가 반대했다.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은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가 집에서 살림하는 것'(그렇지 않다 90%), '직장상사가 남자일 때보다 여자일 때 불편하다'(그렇지 않다 80%)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남성은 업무기획과 추진력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데 동의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10명 모두가 반대했다.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만큼 양평원은 이제 이 검사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실시해본 검사에서 주목할 점이 있었다. 성평등 의식은 높았지만, 성평등 정책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성평등정책들은 남성의 입장은 무시하고 여성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그렇다 30%·그저 그렇다 60%), '정부나 기업 등에서 여성을 위한 많은 제도가 있음에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요구만 한다'(그렇다 50%·그저 그렇다 20%)에 수긍 비율이 높았다.

페미니즘을 오해하고 거부하는 '페미니즘 백래시'의 영향이며, 임금·승진에서 여성차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이지만 제도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성차별은 이제 없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해서다.

이전 조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드러난다.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을 지지하지만(87%·경기연구원·2019),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거부감(52.7%·한국리서치·2021)이 크다.


그래픽= 김문중기자

그래픽= 김문중기자


소수 분파 페미니즘에만 주목해 거부

"'한국 남성들이 싫다'는 이유로 4B(비연애, 비출산, 비결혼, 비성관계) 운동을 남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여성 권리 신장 운동에서 크게 벗어난 것 아닌가." 김지훈(25·이하 모두 가명)씨의 말이다. 고현종(52)씨 역시 "최근 페미니즘은 여성우월, 남성차별로 변질되고 있다"라고 본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은 사회의 극심한 여성 혐오에 맞선 강력한 맞대응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다"며 "이런 과정에서 유발되는 갈등이 페미니즘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되고 인식된다"라고 봤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도 "소수 집단은 어디에나 있는데 분파를 향한 비판을 페미니즘 전면으로 가져와 '페미는 정신병'으로 왜곡하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신 교수는 "여성혐오 진영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공격하려 페미라는 단어로 비난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의도적인 오해라는 뜻이다.

신 교수는 "페미니즘 자체는 민주주의라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두고 북한이나 중국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지 않나"라면서 "(페미니즘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사상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주차장'이 페미니즘? '여성혐오' 정책

여성혐오는 이제 투표권 박탈 등 직접적인 억압이 아니라 취업·임금·승진 차별, 성범죄 만연 등 구조적이고 교묘한 형태로 전환됐다. 그러다 보니 "내가 겪지 않았으니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20대 여성인 박서은(27)씨 역시 "현재에 만족하기에 성평등을 목표로 무엇인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할 생각이 없다"며 자신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을 비롯한 해외 선진국에서도 꾸준히 '페미니즘의 종말'을 선언해 왔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났고 대학 진학률 등에서 여성이 사회적 성취를 이뤄 냈으므로 페미니즘은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만난 비 페미니스트들 역시 사회적으로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이 충분하며,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지나친 요구를 한다는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박씨는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여성 전용 주차장'은 모순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 우대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혐오의 결과이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경기도에 있었던 버스의 여성 배려석 '핑크존'의 사례를 들었다. 허 조사관은 "여성 배려석은 심야시간대 광역버스에서 성추행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여성끼리 앉아 가라'는 취지로 만들어졌다"며 "여성 주차장 역시 주차장에서의 여성 상대 강력범죄가 늘어나자 이를 막으려 출입구 근처에 설치됐다"고 설명했다. 범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임시방편으로 등장한 제도였다는 것.

또 이런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은 운전을 못한다'라는 색안경 탓에 확대되기도 했다. 이주희 교수는 여성 전용 주차장을 두고 "여성의 운전 능력이 남성보다 낮다는 편견과 여성의 가사전담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 소비의 주체로서 여성을 우대하려는 잘못된 상업적 고려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 우월주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덧씌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 더 혜택 받는데 '여성할당제'로 낙인

"페미니즘을 통해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우월적 지위를 원하는 것 같아서 싫다." 문태석(32)씨의 말이다.

한국일보가 만난 비 페미니스트 중 문씨를 비롯한 7명이 하나같이 외친 이야기는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라는 것이었다. 휴스턴-다운타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트리스틴 J.앤더슨은 이런 현상이 "이미 성평등을 이뤘다"는 착각에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통념은 나아가 '여성들이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한 결과 이제 성차별의 희생자는 남성'이라는 주장이 된다"라고 했다.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거나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제도에도 '피해자는 남성'이라는 망상이 횡행한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 교수는 "여성 할당제는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양성채용목표제와 같은 제도의 수혜자는 오히려 남성으로 나타나는데도 '남성의 피해'라고 주장하곤 한다"면서 이를 '상상적인 피해'로 인한 거부감이라고 했다. 이주희 교수 역시 "우리나라에서 할당제는 성중립적인 제도"라고 설명했다.

공무원 양성평등채용목표제를 보면, 특정 성이 정원의 30%에 미달하면 그 성별을 정원 외로 추가 합격시킨다. 이 제도로 2015~2019년 국가직·지방직 채용에서 추가 합격한 인원은 1,600명가량인데 1,200명이 남성이었다. 교대에서는 아예 여학생 비율이 60~80%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남성 할당제'도 있다.

김수아 교수는 "결국 능력주의 혹은 구조적 차별에 대한 공유된 감각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구조적 차별이 있고 이런 차별은 개인이 저항할 수 없어 구조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차별을 해소하려는 조치를 '능력주의적 해법을 해치는 문제'로 보게 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도 '나도 능력이 충분한데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주장하나'라고 생각하면서 페미니즘을 피곤하고 나에게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페미니즘, 남성을 가부장 족쇄에서 해방

오늘날을 여성상위시대라고 보는 남성 임진환씨(44)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가 집 안에서 살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남자는 될 수 있으면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라고 여긴다. 임씨의 이런 부담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남성도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가부장제의 짐을 나눠 드는 일 역시 페미니즘이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페미니즘이 없었더라면 남성들은 가부장제 아래 모든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면서 "여성들이 취업을 하고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며 부담을 나눠 지게 된 것"라고 전했다.

여성의 군(軍) 복무도 마찬가지다. 군 복무는 남성 역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지만 군대에 여성을 들이지 않았던 건 페미니즘이 아니라 가부장제 탓이다. 김엘리 성공회대 시민평화대학원 외래교수는 자신의 책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에서 "여성에 대한 군 복무 면제는 가부장적 사회가 조장해 온 제도"라고 지적했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하려 "여성도 군대 가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이유가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고 나라를 떠받드는 일이 남성만의 몫이라는 가부장적 사고를 더 이상 지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군 복무는 페미니즘에서 오래 연구하고 논의해 온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페미니즘의 갈래마다 결론은 갈린다. 실제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얻는 차원에서 여성의 군 복무를 독려하기도 했다.

다만 논의의 방향이 여성의 군 복무 여부에만 쏠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김 외래교수는 같은 책에서 "여성이 군대에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군대는 갈 만한 곳인가'를 묻는 게 더 나은 논쟁 방향"이라며 "젠더 갈등이 아니라 군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샤이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크게

고등학생 유혜정(17)씨는 페미니즘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평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있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여긴다. 남매를 둔 어머니 김진하(58)씨는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하지만, '남성은 업무기획과 추진력이 여성보다 더 뛰어나다'거나 '힘들고 위험한 일은 남자가 앞장서야 한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숨은 페미니즘 지지자를 뜻하는 이른바 '샤이 페미니스트'다.

샤이 페미니스트의 침묵에는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한다. 윤진희(32)씨 역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는 이유를 "굳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남자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데서 찾았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여성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너 페미지'라는 공격이 쏟아진다"면서 "이런 공격을 감당할 수 있는 여성은 없을뿐더러 시달림을 알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라고 외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했다.

페미니즘이 평화로운 세상을 망친다고 손가락질을 받은 현상은 우리나라만 겪은 건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의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타임 등 유수의 언론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삶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를 앞다퉈 묘사했다. 신경아 교수는 "고학력 여성들의 결혼이 늦거나 독거노인이 된다는 식으로, 페미니즘으로 여성의 인생이 불행해진다는 기사가 쏟아졌다"라고 전했다.

그렇기에 지금이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인터뷰에서 만난 고등학생 나재헌(18)군도 비슷한 답변을 했다. 페미니즘은 싫지만 '성평등에 관심이 있다'라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페미니즘이 성평등이 아니라 여성 우월주의라고 알고 있어서 관심이 없고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허 입법조사관은 "페미니즘이 준 이익을 남녀가 누리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욕하고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사실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시대가 너무 많이 달라져 불안하다는 것도 이해한다"면서 "그럴수록 공론장에서 더 많이 말하고, 논의하면서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라고 했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당신에게

<1회>여성을 지운 대선, 현실을 보세요

<2회>여혐 기사, 미러링 해봤다

<3회>알고 보면, 당신도 페미니스트

전혼잎 기자
최나실 기자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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