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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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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내장은 새 학기를 알리는 전령이다. 집으로 배달되는 문서가 어린 학생들의 가방이라면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안내문의 시작은 하나같이 자연을 소환한다. '새싹이 눈을 뜨는 교정'이라든지 '학생들의 웃음꽃으로 찾아오는 봄'과 같은 표현이 차고 넘친다. 머지않아 '목련이 손짓한다'라거나 '벚꽃이 수다스럽게 재잘거린다'라는 시적 표현도 안내문의 머리를 장식할 것이다. 익숙한 만큼 서식에 으레 쓰는 표현이겠거니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연도 사람인 양,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 양 그렇게 살아온 한국 사람들과 닮았다. 이러한 문투가 전 세계에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동요를 들여다보면 온통 의인법이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생각하며 서 있는 꼬마 눈사람이 있고, 혼자 남은 섬 집 아기에게는 자장노래를 불러 주는 바다가 있다. 냇물은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이고, 뒷문 밖에서는 갈잎이 노래를 한다. 만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린아이를 겨냥한 표현이라고도 하겠지만, 의인법은 어른들의 세계 곳곳에도 많다. 한국말에는 문에도 턱이 있고, 김밥에도 터질 옆구리가 있다. 방문 전체를 네모난 얼굴로 봐야 '문턱'이 가능하고, 김밥을 몸통으로 봐야만 '김밥 옆구리'가 성립되지 않는가? 지상 가까이 뜬 '밑턱구름', 대기권 윗부분에 떠 있는 '위턱구름'이란 말도 마치 사람의 두 턱을 보는 듯하다.
해바라기는 이름만 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이다. 일생 동안 멀리서 해를 바라만 보다 서서히 시들어간다. 이 꽃을 '해바라기'라 부르는 한국인은 짝사랑과 열정의 경험을 이름에다가 담았다. 산에는 구름이 노니는 '산허리'가 있고, 넘어가다가 잠시 걸터앉을 '산이마'도 있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면 '산자락'이 펼쳐진다. 산자락은 마치 엄마 치맛자락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으려는 아이들을 품듯 들꽃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비를 '단비'라고 한다. 이 비가 농부에게만 달까? 석 달 열흘을 하늘만 쳐다보던 메마른 땅에 이 비가 달 것이라고 보는 우리 마음도 이 말 속에 있지 않을까? 바싹 마른 잎들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움찔거린다. 마치 먼저 적신 잎들이 발아래 잎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듯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자연도 이웃처럼 보는 한국 사람들의 눈, 그 눈이 만들어 낸 우리말이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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