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 경제·금융제재 여파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2건의 달러 표시 국채에 대해 16일(현지시간)까지 1억1,700만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보유 외환이 고갈된 러시아 측은 최근 이자를 약정통화인 달러 대신 러시아 루블화로 지급하겠다는 입장만 밝혀, 끝내 달러 지급이 안 되면 해당 국채부터 사실상 디폴트에 빠지게 된다.
▦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국채 대외채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건 처음이 아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수출이 타격을 입고 해외 투자유입도 급감했던 1998년에도 루블화 채권에 대한 대외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돈을 못 갚겠다는 디폴트와 달리, 모라토리엄은 단지 지불을 유예한다는 얘기다. 그것만으로도 당시 세계 최고의 헤지펀드로 손꼽혔던 미국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하고, 월스트리트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이 발생했다.
▦ 러시아는 2015년에도 모라토리엄 위기에 다가갔다. 당시에도 우크라이나 관련 지정학적 위기가 작용했다. 푸틴의 러시아는 서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2014년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귀속시켰다. 러시아 해외자산동결, 주요 은행 거래금지, 수출입 제한조치 등이 가해졌다.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고, 국가부도 위험을 반영하는 CDS프리미엄은 치솟았다.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 이란 견제 등에 따라 유가가 배럴당 40달러까지 추락한 것도 위기의 러시아에는 악재였다.
▦ 크림반도 귀속 때와 달리, 러시아는 이번에 우크라이나 수도까지 침공하는 전면전을 감행했다. 경제제재 수위도 석유금수를 포함해 극단화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러시아가 직면한 디폴트 위기다. 물론 공식 디폴트는 향후 30일간 부여되는 이자 지급 유예기간 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달러당 100센트 내외로 거래되던 러시아 달러 국채는 이미 최저 5센트에 거래될 정도로 휴지 취급을 받고 있다. 푸틴의 무리한 도발로 러시아 국가신용도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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