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글과 그림에 딱 맞는 옷 입히는 일”… 53년 외길 '표구 장인'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표구(表具)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예민하고 어려운 작업이에요. 작은 실수라도 했다간 작품 주인들의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지죠."
글과 그림에 옷을 입혀 혼을 불어넣는 표구. 제주 ‘충옥당(忠玉堂)’ 구봉식(70) 대표는 반평생 넘게 표구 외길을 걸어온 장인으로 통한다. 제주시 원도심인 이도1동 오현길 중간에 위치한 제주 유일의 표구거리에서 42년째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거리 양쪽에는 표구사와 화랑이 늘어섰다. 하지만 한때 북적였던 이곳도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찾는 이들이 크게 줄었다. 다행히 특유의 예술적 분위기와 예스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심에 제주 예술인들이 사랑하는 구 대표와 그의 가게가 자리 잡고 있다.
10일 충옥당을 찾았다. 구 대표의 다부진 체격과 작업대를 오가는 분주한 손놀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손길을 거친 글과 그림들은 꼭 맞는 옷을 입고 완벽한 작품으로 탈바꿈해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날 구 대표는 전시회에 출품할 서예작품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자리에 붓으로 풀칠을 한 뒤 한지를 가지런히 덮고 다시 뒤집어 풀칠을 반복한 후 작업실 한쪽에 세워둔 건조판에 작품을 붙이는 배접(褙接) 작업이 이어졌다.
18세에 시작해 53년째 매일같이 반복해 온 작업이기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동시에 매순간 작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긴장감이 더해져 날카로울 정도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 장인의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듯, 작업실 내부 곳곳에는 40여 년에 이르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었다. 가게를 열 때부터 사용했다는 건조판에는 그간 머물다 간 수많은 작품의 발자취가 묻어 하얀 종이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였다. 또 작업대와 그 위에 놓인 여러 종류의 작업붓들, 아크릴판으로 만든 여러 길이의 자 등에도 거뭇거뭇한 손때가 묻어 있었다.
구 대표는 “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뤄지기에 잘못하면 먹이나 물감이 필 수도 있고, 또 잘못하면 종이가 찢어지거나 구겨질 수도 있다"며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집중하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표구를 의뢰하는 고객 중 대부분이 예술인들"이라면서 "연필 끝, 붓 끝으로 전 세계를 보는 사람들인지라 보는 눈이 셀 수밖에 없고,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좋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표구된 작품은 몇 날 며칠을 걸어 놓고 전시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기 때문에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한다"며 "표구가 잘못되면 작품 가치도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충북 보은 출신인 구 대표가 생면부지의 낯선 제주에 터를 잡기까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부보다는 기술을 하나 배우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18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여러 가지 일을 배우던 중 표구 기술에 유독 끌렸다. 무엇보다 별다른 밑천 없이도 점포 하나만 있으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마음에 들었다. 1970년대 당시 경제가 호황을 타면서 골동품 붐이 일었는데, 그와 함께 표구점도 성업을 이룬 시기다.
구 대표는 서울 인사동과 아현동의 표구사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때 제주 출신 서예가로 행서와 초서의 대가로 알려진 해정(海丁) 박태준 선생(1926~2001)을 만났다. 그가 일하는 표구사의 단골손님이었다. 해정 선생은 구 대표가 제주에서 평생 뿌리를 내리게 한 인연이자, 은인이었다.
당시 구 대표는 경쟁이 치열했던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 점포를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이왕이면 제주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고, 1979년 별다른 준비 없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삼남매를 데리고 제주에 내려왔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향에서 점포를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해정 선생의 도움으로 지금의 충옥당을 빌려 이듬해 1월 자신의 첫 점포를 열어 42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정 선생은 ‘모든 것에 충실히 열심히 하다 보면 옥같이 빛난다’는 뜻과 함께 충청도 출신인 그에게 고향도 부모도 잃지 말라는 의미로 충옥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현재 점포 입구에 오랜 시간이 입혀져 색이 바랜 ‘충옥당’이라고 쓰인 현판도 해정 선생의 작품이다.
구 대표는 “처음 제주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딱 3년만 있다가 돌아가자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 평생 머물러 있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당시 최고 일류의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삼류만 아니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다'면서 "그러다 보니 제주에서 인연이 쌓여 갔고, 결국 지금까지 온 것 같다”고 회상했다.
구 대표의 이름은 좁은 제주지역 예술계에서 금방 입소문을 탔다. 당시 제주에는 표구사가 몇 군데 없었다. 목공 기술을 다루면서 혼자서 표구와 액자의 나무틀까지 직접 만드는 점포는 현재까지도 구 대표가 제주에서 유일하다.
당시 다른 표구사들은 부산이나 서울 등에 있는 목공소로부터 정해진 크기의 나무틀을 주문했기 때문에 일부 크기가 애매한 작품들의 표구작업은 구 대표에게 몰렸다. 차츰 제주지역 작가들과 표구 작업이 많이 필요한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미술학과 대학생 등 단골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한번 구 대표의 손맛을 본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주위에 소문을 내줬고, 그 덕택에 밤샘작업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일감이 몰렸다.
작품 복원 실력도 구 대표가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였다. 원래 표구사의 주요 작업 중 하나가 훼손된 작품들을 복원하는 일이다. 표구 작업보다 몇 배나 힘들고, 정교함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이다. 제주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중요민속자료인 내왓당 무신도, 제주 출신의 서예 대가 소암 현중화 선생의 작품도 그의 손길로 재탄생했다. 또 제주 미술계의 대표적 작가인 양창보 전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의 작품을 복원한 것도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양 교수의 집에 불이 나 많은 작품들이 검은 연기에 그을리자 구 대표를 찾았고, 수일이 걸려 80여 점을 복원하며 명성을 쌓았다.
1980~90년대는 표구거리의 전성기로, 20여 개의 표구사가 성업했다. 제사나 명절에 사용하기 위해 병풍 하나씩은 집에 들여놨다. 집들이 선물로 글이나 그림이 표구된 액자를 주던 시절이었다. 돈 많은 재일교포들도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고향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병풍이나 표구를 맡긴 작품들을 바리바리 사 가지고 갔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글씨나 고서화 대신 사진이 인기를 끌었다. 기성복처럼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액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표구사들도 하나둘씩 표구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현재 표구거리에는 10곳밖에 남지 않았다. 충옥당처럼 표구와 복원작업을 모두 할 수 있는 표구사는 몇 곳밖에 없다.
구 대표는 “표구사의 주 고객이 예술가들인데, 잘나가는 작가들은 빼고 대부분은 배고픈 직업"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저들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표구 값도 많이 받지 못했다”며 “그래도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냈고 건물도 하나 장만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게 산 것 아니냐”고 기억을 더듬었다.
장인의 표정에는 끝내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는 “이제 기껏해야 4, 5년 후면 은퇴해야 하는데 표구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주위에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표구거리를 지키며 일생을 동고동락한 충옥당 간판이 곧 내려질 처지에 놓인 것을 아직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