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는 분위기 깬다"는 당신, 그들 유머엔 웃을 수 있나요

입력
2022.03.19 04:30
12면

<62> 사회적 약자의 대안적 유머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화난 표정의 페미니스트를 조롱하는 '밈'. 구글 캡처

화난 표정의 페미니스트를 조롱하는 '밈'. 구글 캡처


페미니스트가 웃길 수 있을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관심이 있다. 첫 번째는 성차별주의자다. 이들은 남들이 다 웃는 대목에서 뻣뻣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킬조이(killjoy)'들, 즉 '분위기를 깨는' 페미니스트들이 삶을 즐기는 법을 모르고 그래서 웃길 줄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페미니스트가 그들을 웃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런 '분위기 깨기', 즉 '심각함'을 통해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미니스트들은 온갖 상황들로부터 '불편함'을 느끼고 그런 불편함에 대해 항의하느라 심각해져 있다. 대개의 경우 심각한 사람들은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희화화된다.

비교적 웃을 일이 많을 성차별주의자들은 인터넷에서 심각한 페미니스트들을 발견하고는 칭찬인지 모욕인지 모호한 이런 댓글을 단다. "웃기고 있네!" 성난 페미니스트의 얼굴은 밈(meme)으로 '박제'되어 성차별주의자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내부에서 웃음거리로 유통된다. 누구 한 명이라도 웃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성차별주의자들에게 페미니스트들은 '웃기는 것들(things)'일 뿐, 자기를 웃길 만한 자격을 갖춘 진짜 주체는 못 될 것이다.

'웃기는' 페미니스트의 '웃지 않는' 저항

노래 '마더 오브 펄'을 부르고 있는 넬리 맥케이. 유튜브 캡처

노래 '마더 오브 펄'을 부르고 있는 넬리 맥케이. 유튜브 캡처


가수 넬리 맥케이는 '마더 오브 펄(mother of pearl)'에서 재치있게 이렇게 노래했다. "페미니스트는 유머 감각이 없어요/그들은 아동 성추행이 우스운 일이 아니라고 하죠/강간과 모욕은 범죄라고도 하죠/만연하는 성매매가 뭐가 문젠데?/이 아가씨들은 징징대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나요?"

노래 속 가사는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에 대항하기를 시도한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유머 감각이라는 것이, 아동 성추행과 강간과 성매매를 단지 웃기기만 한 일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런 유머 감각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말이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하는 넬리 맥케이를 비롯해 '분위기를 깨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웃지 않는 것은 저항의 한 방법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들이 웃긴 일이라고 합의한 일에 대해 웃지 않음으로써 강제적 평화 아래 침묵당한 누군가의 '불행'을 표정 위로 드러낸다.

문화 이론가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위기를 깨는) 페미니스트 주체가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성차별 같은 불행한 주제들을 놓고 떠들어대서이기도 하지만, 행복이란 게 잘 지내지 못함을 나타내는 바로 그 기호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메드의 관점에서 성차별적 농담이 오가는 술자리에서 웃지 않는 것은 단순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머 감각을 잃은 듯 보이는 페미니스트의 무표정은, 성차별적 농담이 의존하는 성차별적 전제들이 누군가에겐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과, 다름아닌 그들의 불행을 부정하고 억압함으로써 당신들의 성차별적 농담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일깨우는 저항의 실천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웃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페미니스트가 웃길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바로 페미니스트들 본인이다. 이들은 성차별주의자들의 테이블에서는 무참히 '분위기를 깨다'가, 마음이 맞는 동료들 앞에서는 자조와 냉소가 섞인 '내부자 유머'를 유창히 구사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아직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았으며 여전히 누군가를 웃길 능력이 있음에 안심하고 뿌듯해한다.

이들은 삐딱하게 팔짱 낀 채 어디 한번 웃겨 보라는 식으로 구는 성차별주의자들을 웃기는 데에는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잠재적 아군이라 할 만한, 벌써부터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를 웃기는 데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다. 왜인가. 성차별주의자들만큼이나 웃을 줄 아는 페미니스트들 역시 웃음의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체적 표현보다 전염성이 강한 웃음은, 이질적인 개인들을 통합하는 '사회적인 제스처'로서 유용한 기능을 한다. 요컨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에 뚜렷한 사회적 통합 기능과 도덕적 교정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를 위협할 만한 결함이 있는 개인을 비웃고 모욕줌으로써 그를 본보기 삼아 잠재적인 위협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웃음의 역할 중 하나라 본 것이다. 따라서 웃음은 결코 공정하지도 선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격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웃음이 터지는 장소들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무성적인 안전지대가 아니다. 웃거나 웃지 않는 반응을 통해 개인은 우리로 묶이고 우리에 속하는 '아군'과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적군'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속하기 위해 각각의 개인은 언제 웃고 또 웃지 않을지를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학습한다.

페미니스트의 대안적 유머에서 핵심 중 하나는 이러한 웃음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되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대상을 향하도록 웃음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남성중심사회에서 모욕당한 대상들의 관점에서 '진짜 웃기는 것들'이 누구인지 한번 보자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페미니스트의 대안적 유머는 지금까지 웃음거리였던 사회적 약자들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아군'의 얼굴을 확인하고 생전 처음인 것처럼 '우리'로서 웃을 수 있는 장소를 열어 젖히고자 시도한다. 이들의 전략에서 유머는 '우리' 페미니스트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성차별주의자를 공격하려는 의도로서 고안된 무기이다.

분노와 실망, 유머가 되다

코미디언 앨리 웡의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앨리 웡: 돈 웡' 포스터. 넷플릭스 캡처

코미디언 앨리 웡의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앨리 웡: 돈 웡' 포스터. 넷플릭스 캡처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대안적 유머를 구사하는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앨리 웡이다. 얼마 전 나는 웡의 넷플릭스 신작 '돈 웡'을 봤다. 과연 웃겼다. '돈 웡'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농담 중 하나는 웡의 놀라운 변비에 관한 것이다. 웡은 영화를 찍느라 너무 바빠서 자그마치 6주간 "똥 싸는 걸 깜빡 했고" 그 결과 내장이 "변으로 된 만리장성"으로 가득 찼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성 변비를 겪고 있는 당사자로서 웡의 이어지는 통렬한 지적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남자들은 똥 누는 걸 절대 잊지 않아요. 어떻게 잊겠어요? 매일 아침 변기에 앉아 성스러운 의식을 치루며 똥을 소환하잖아요. 여자들은 그러지 않아요. 죄책감과 수치심이 너무 커서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앉아서 똥을 소환할 수 없어요. 대신 똥이 하루 중에 가장 곤란한 시간에 우릴 찾아오죠. 여자가 마침내 똥을 눌 땐 늘 비상 상황이에요."

인간의 필수적인 행위 중 하나인 배설 행위에서조차 남성과 여성의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다니! 웡은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생리적 활동을 파헤치는 '화장실 유머'를 통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모세혈관을 드러내는 탁월한 '성차별주의자'다. 나는 한편으론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어린 시절 매일 아침 변기를 점령하다시피했던 아빠에 대한 기억이 결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많은 이들이 그 대목에서 폭소했기 때문이다.

웡의 농담에 정신 못 차리고 웃는 사람들 중에서, 부부 사이로 추정되는 중년의 백인 남녀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며 뭔가를 암시하듯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다. 남자는 경직된 얼굴로 간신히 미소를 띤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웃는 여자들과 웃지 않는 남자들이 대비된다. 내가 앨리 웡의 스탠드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자 또 가장 불화의 에너지가 넘치는 일촉즉발의 순간이기도 하다.

국내에도 대안 코미디를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여성 스탠드업 크루 '블러디퍼니'는 그런 이들 중 한 크루다. 텀블벅 캡처

국내에도 대안 코미디를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여성 스탠드업 크루 '블러디퍼니'는 그런 이들 중 한 크루다. 텀블벅 캡처


미국 남성 코미디언 '미투'를 다룬 기사들. 구글 캡처

미국 남성 코미디언 '미투'를 다룬 기사들. 구글 캡처


최근 페미니스트의 대안적 유머를 상품화하는 시장의 크기는 날로 불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요인은 물론 지난 몇 년간 거세게 불어닥쳤던 '미투'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 만행이 폭로된 남성 코미디언들의 유머에 더 이상은 웃어 줄 수 없다고 판단한 페미니스트 대중들의 분노와 배신감, 죄책감일 것이다. 이 같은 '문제적' 상황은 어쩌면 페미니스트 대중들의 깊은 분노와 실망만큼이나 유머의 형식을 다채롭게 만들 기회가 아닐까? 때때로 '여성에게 안전한' 유머를 표방할 뿐 지루하고 밋밋한 코미디에 불만을 품다가도, 어쩔 수 없이 응원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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