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나쁜 말 경쟁 말고 뭐가 있었나

입력
2022.03.16 00:00
27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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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의 실패가 폭력을 잘못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의 실패는 말을 잘못 사용한 것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동의에 의한 지배'를 뜻하고, 동의는 설득의 힘으로, 설득은 강제가 아닌 말의 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도 폭력은 행사되며, 강제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 국가나 정부 자체가 구속력을 행사하는 합법적 폭력이자 강제력이다. 이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민주주의는 말과 설득이 우선인 체제다. 피치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정치 실패는 동의의 실패, 동의의 실패는 설득의 실패, 설득의 실패는 말의 실패가 낳은 긴 결과로 이해될 일이다.

말은 중요하다. 고약한 말은 미움을 낳는다. 신뢰할 수 없는 말은 협동의 가능성을 없앤다.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말에서 비롯된다. 정치는 더하다. 함부로 내뱉은 정치가의 말은 정치도 함부로 하겠다는 신호다. 그 신호에 따라 지지자들은 작정하고 더 함부로 한다. 말이 좋은 정치는 좋은 시민을 낳고, 말이 나쁜 정치는 나쁜 시민을 낳는다. 정치가들이 무례해지면 지지자들은 더 무례해진다. 혐오와 복수의식이 정치의 편을 나누면, 시민도 편을 나눠 적의를 불태운다. 그들이 쏟아내는 참여의 열정은 민주적 시민 문화의 토양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절반쯤 살해하는 내전(civil war)의 에너지가 된다. 이번 대선이 그랬다.

사랑보다 미움이 더 강한 정념이듯, 선호보다 혐오가 선거를 압도하기 쉽다. 미움과 혐오는 의심을 낳는다. 의심이 눈을 가리면 편향된 현실만 보인다. 사실조차 파당적으로 독점하려는 욕구도 제어가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이견(異見)이 이적(利敵)이 되고, 어느 한편의 독단에 편들기만 가능한 선거가 되면, 세상 그 어떤 민주주의도 견디지 못한다. 선거는 시민의 마음을 양극화시킬 뿐 기대했던 민주적 효과를 낳지 못한다. 적어도 어느 한편은 결과를 받아들일 마음 상태가 아니다. 축하와 위로보다 저주와 되갚음의 결의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어도 좀처럼 증오심이 가시지 않는다. 그 속에서 패자의 쓰라림은 배가될 수밖에 없고 승자의 기쁨도 오래 못 간다.

달라서도 같이 할 수 있고, 달라서 같이 해야 정치다. 다름 속의 정치가 더 큰 가치를 발휘해야 민주주의다. 그런데 그간 우리 정치는 어땠나? 이견을 통해 배우고 조정하고 타협하는 정치였을까? 그런 정치는 없었다. 서로를 등지고 각자의 지지자 집단을 향해 말을 쏟아내는 정치만 있었다. 누가 더 잘 상대를 모욕할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중상(calumny) 정치', 상대의 잘못을 누가 더 잘 고자질할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아첨(flattery) 정치'였다. 여와 야는 있으나 여-야 사이는 없는 정치, 경멸과 야유 조의 언어가 습성화된 정치, 더 세고 더 강한 나쁜 말의 경쟁체제 이상 그 무엇이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선거는 끝났지만, 나쁜 말로 정치를 망가뜨린 자들은 주춤하고 있을 뿐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들이 다시 앞에 나서면 정치가 좋아질 가능성은 없다. 말이 나쁜 자들이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정치, 최소한 거기까지는 전진해야 한다. 말이 나쁜 자들이 다시 환호받게 되면 정치의 미래는 있을 수 없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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