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매일 버리는 쓰레기지만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통해 살아간다. 쓰레기는 폐기물 그 이상, 사회의 거울이고 그림자다. 도시빈곤문제를 연구해온 사회학자 소준철 박사가 쓰레기 안에 담긴 우리의 삶, 공간, 역사를 추적한다.
<1> 난지도 매립지의 시작
'제2여의도' 기대했던 난지도, 갑자기 쓰레기 처분장으로
1977년 8월 3일. 서울시는 지금의 상암동 자리에 있는 난지도를 쓰레기 처분장으로 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난지도와 인근 샛강이 포함됐고, 전체 면적은 87만 평으로 여의도만 했다.
난지도의 쓰레기장화는 꽤 큰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난지도는 ‘제2의 여의도’가 될 것이란 기대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여의도 개발과 영동(강남) 개발, 그다음은 한강 서쪽의 난지도가 유력하게 거론됐다. 더구나 서울시는 난지도를 준공업단지로 육성한다는 소식을 언론에 흘렸고, 사람들 사이에선 '상암동이 그린벨트에서 풀려 개발될 것' '다리가 놓여 강 반대편에 조성될 남부순환도로로 길이 날 것'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난지도 개발을 앞두고 땅을 비싼 값에 사들여 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3일의 갑작스러운 쓰레기 처분장 지정 고시는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서울시의 ‘준공업단지 육성설’은 일종의 사기였다. 서울시는 이미 난지도의 쓰레기장화를 결정해둔 상태였다. 그해 1월에 열린 도시계획위원회의 안건 중 하나가 난지도의 쓰레기 및 오물처리장 지정에 관한 건이었고, 위원회를 통과했다. 사람들은 난지도를 두고 새로운 여의도니 새로운 강남이니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서울시는 처음부터 난지도를 쓰레기장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서울시는 그런 계획을 숨긴 채 비밀스럽고 갑작스럽게 난지도 매립지를 발표했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파악하거나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일 없이 무모하고 일방적으로 진행했다. 난지도 사람들은 땅을 뺏겼고, 작은 섬 난지도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난지도를 누리며 살았던 사회
난지도 매립지는 서울시의 일방적, 강압적인 행정력으로 설치된 대형 매립지다.
대형 매립지가 등장했던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1970년대까지 쓰레기 매립은 건설공사와 관계가 있었다. 소규모 건설현장이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같은 대규모 건설현장에서 지반을 다지기 위해 구청에서 쓰레기를 트럭째 사들여 처리했다. 당시 서울시 쓰레기는 주로 연탄이었고, 공사현장에선 연탄재로 지반을 다졌다.
그러나 공사현장이 점점 줄어들며 쓰레기를 매립할 현장도 줄었다. 서울시는 대체매립지를 찾았고, 그 결과가 난지도였다. 당시 서울시 행정책임자들이 난지도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강 수면에 비해 난지도는 지면이 7미터가량 낮았는데, 그만큼을 쓰레기로 채우고, 신도시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지도의 매립량은 계획량을 넘어섰고, 사용연한 역시 15년까지 늘어나며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사실 당시만 해도 난지도 대형 매립지는 이점이 많았다. 우선 청소행정이 간결해졌다. 서울시는 난지도에 사업소를 설치해 매립지를 관리했고, 각 구청은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쓰레기를 모아 난지도에 내다 버리면 그만이었다. 시민들도 서울시 청소행정에 책임을 맡기며, 대형 매립지의 편리를 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드러났다. 매립은 매립지의 쓰레기수용능력에 따라 운영기한이 결정되기 때문에 언젠가는 포화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는 처리방법이었다.
난지도 사람들의 비운의 삶
대형 매립지는 쓰레기 처리를 외주화하는 방식이다. 매립지는 공식적으로 난지도 관리사업소의 인력에 의해 운영된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난지도 관리사업소의 공식인력 외에도 비공식적 인력사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비공식적 인력'이 일하는 방식은 이랬다. 쓰레기를 가득 실은 트럭이 쓰레기장의 사람들 앞에 쓰레기를 가득 부으면, 사람들은 팔 수 있을 만한 폐품을 골라낸다. 그러고는 땅을 평평하게 다듬고, 다음 트럭을 기다린다. 몇 차례를 반복한 다음, 매립지 안과 밖에 있는 고물상에 폐품을 판다. 그들은 지금 ‘재활용품 선별처리시설’의 선별장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한 것이다.
한동안은 그 어떤 계약도 없었다. 1984년이 되어서야 일용인부 계약을 맺고 일했다. 난지도에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3,973명(1984년 기준) 있었고, 인근 상암동 주민들도 종종 참여했다. 또 그들은 대형 매립지와 고물상을 연결했고, 고물상은 서울 중고시장이나 재생공장에 재생재료를 파는 ‘폐품경제'를 만들어냈다.
난지도에서 일한 이들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의 난쟁이 가족의 미래였다. 연이은 판자촌 철거는 도시 하층민의 불안정한 주거, 불안정한 일자리로 이어졌다. 판자촌 철거로 떠돌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트럭으로 쓰레기를 부어 땅을 다지는 현장에서 폐품을 줍던 넝마주이나, 혹은 거리의 넝마주이들이 난지도로 몰려들었다. 계절에 따라 일이 들고나는 날품팔이를 할 바에야 계절에 상관없는 쓰레기 줍기를 하겠단 심산이었다. 혹은 부랑인으로 몰려 자칫하면 수용될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도시의 버려진 곳으로 향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1980년 내내 도시 가장 아랫자리의 존재들로 재현됐다. 정연희의 '난지도'(1984), 유재순의 '난지도 사람들'(1985), 이상락의 '난지도의 딸'(1984), '동냥치 별'(1990)과 같은 소설들, 강행원의 그림, '난지도의 딸'을 기초로 한 김문옥의 '욕'(1988)과 같은 영화에서 말이다. 이들은 난지도 매립지 북쪽에 판잣집을 지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골라 팔며 생활했다.
난지도는 정말 사라진걸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만들어진 대형 매립지는 도시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을 도시 바깥으로 떠넘겼고, 또한 처리하는 일 역시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떠맡겼다. 다시 말하자면 중산층화되어가는 도시에서 발생한 쓰레기이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제적 성장에 가려진 것들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버린 걸 묻고 쳐낸 건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몫이었다. 1993년 난지도의 매립이 종료될 때까지 15년 동안 98m짜리 산 두 개가 생겼고, 그 총량은 최소 9,200만 톤이었다. 이 쓰레기는 모두 서울 안에서 (그리고 난지도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연탄재였고, 나머지는 새로운 시대의 유행과 필수품들이 차지했다. '난지도의 딸'을 쓴 소설가 이상락은 인터뷰에서 “그 사람들을 난지도로 몰아간 사회구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난지도를 렌즈 삼아 2022년의 지금을 다시 보자. 서울과 난지도의 관계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관계로 바뀌었다. 난지도 매립지는 인천의 수도권 매립지로 바뀌었고, 쓰레기산 넝마주이들의 자리는 각 시·구의 재활용 선별처리장의 노동자와 비수도권의 쓰레기 중간처리업체로 바뀌었다.
난지도 체제는 여전하다. 쓰레기 처리의 장소를 내가 사는 곳 바깥으로 떠밀고, 그 일을 도시의 일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떠미는 상황이 과연 지속되어야 할까?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인 시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형 매립지가 아직도 필요한지 따져 물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쓰레기의 처리를 다른 지역과 다른 이들에게 떠밀지 않을 고민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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