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과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차일피일하다가 턱걸이로 마지막 날에 관람을 마쳤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주최한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 얘기다. 작년 9월부터 시작한 전시를 마감날인 이달 6일에야 갔으니, 길을 나서면서 스스로도 한심해서 혀를 차기 바빴다.
무령왕(462∼523, 재위 501∼523)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기록이 많이 나온다. 일본에서 출생한 무령왕은 그 생애가 드라마틱하고 족적도 뚜렷하다. 유명한 기록 중 하나가 중국 정사 '양서(梁書) 백제전' 521년에 나오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고 선언한 대목이다. 작년은 '갱위강국'을 선언한 지 1500년이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됐는데, 고대사 연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유물의 화려함이나 축조의 정교함은 물론이거니와,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확실히 기록된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묘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기실 필자도 이 묘지석을 보기 위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씨체와 내용도 직접 보고 싶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료 사진을 보면 묘지석 앞면에 구멍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뒤까지 뚫려 있는 건지 분간이 힘들었다. 직접 확인해보니 왕과 왕비의 묘지석 모두 앞에서 뒤까지 관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현재까지 그 용도는 추측만 할 뿐이다.
왕의 묘지석에는 이렇게 써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七月壬辰崩), 을사년(525)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원문의 '붕(崩)'에 눈길이 간다. '예기(禮記)'와 '춘추(春秋)'에 따르면 망자의 신분에 따라 용어와 장례 기간을 달리해야 한다.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 제후(諸侯)가 죽으면 훙(薨), 대부(大夫)가 죽으면 졸(卒), 사(士)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고 한다.
천자는 왜 '붕'이라고 하는가. 높은 것, 두터운 것, 존귀한 것이 허물어지는 것을 '붕'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령왕에게 '붕'을 쓴 것은 그의 신분을 알려준다. 조선 임금이 사망하면 왕조실록은 예외 없이 '훙'을 썼다. 왜 3년(정확히 27개월)이 지나서 매장하는가. 나라가 넓기 때문이다. 즉 제후들이 와서 문상할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통신과 교통에 따른 규정이다. 폐언하면, 무령왕은 넓은 나라를 다스린 천자였다.
전시실을 나서는데 유리옥(琉璃玉)이 보였다. 분석 결과 원료에 포함된 납의 산지가 태국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백제가 누비던 바다는 얼마나 넓었는지 상상해 보았다.
무령왕은 한국사에만 속한 분이 아니다.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桓武) 일왕(737∼806, 재위 781∼806)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2015.6.25.동아일보) 일본 왕실이 무령왕을 조상으로 여기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무령왕을 기리며, 우리나라도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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