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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 피살된 첫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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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연희전문 후신)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지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의 며느리인 에델 반 와그너 언더우드(Ethel Van Wagonor Underwood, 1888~1949)가 1949년 3월 17일 괴한의 총탄에 숨졌다. 당시 에델은 자택에서 연희전문 교수부인회 모임을 주재하던 중이었다. 당시 경찰은 범인이 참석자 중 한 명이던 시인 모윤숙을 살해하려다 에델을 죽게 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대표적 친일 문학인 중 한 명인 모윤숙은 해방 후 잠깐 좌익 활동을 한 뒤 이내 이승만 편에 서서 '남한 단독선거'를 지지하며 1948년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도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후 신탁통치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좌우파 갈등과 테러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그 유탄에 언더우드 일가가 희생된 셈이었다.
언더우드 일가는 1885년 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한 초대 호러스와 그의 아내 릴리어스 호튼(1889년 결혼) 이래 4대에 걸쳐 조선과 일제치하, 해방 후 선교와 교육, 의료, 빈민 구제 등 복지에 큰 족적을 남겼다. 1대 호러스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1885)과 최초 서양의학교육기관인 제중원의학교(1886)를 설립했고, 명성황후의 시의로 입국해 1889년 호러스와 결혼한 릴리 언더우드(1851~1921)도 유교문화에 짓눌린 조선 여성들을 상대로 의료봉사 및 선교활동에 생을 바쳤다. 2대 호러스 호턴 역시 연희전문을 이끈 교육자로서 일제의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해외에 알리는 데 힘썼고, 한국전쟁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이력이 있는 3대 호러스 그랜트 주니어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외신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에델 반 와그너 언더우드는 미시간주 킹스턴에서 태어나 1912년 교육선교의 일환으로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 교회에서 만난 호러스 호턴과 1916년 결혼, 여성 사회선교와 해방 전후 조선인 구호사업에 힘썼다. 그는 해방 후 한국에서 피살된 첫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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