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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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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파서 버스 타고 화훼시장 근처까지 갔다. 파릇한 묘목과 봄꽃들을 보면 좀 개운해질 줄 알았다. 웬걸,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옮기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흡사 약에 취한 듯 대책 없이 몰아치는 졸음을 쫓아내려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래되어 낡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쓰디쓴 커피 몇 모금을 연거푸 마시고 나니 마법처럼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예민해진 청각이 저쪽 테이블에서 나이 든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를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수국 묘목이 나왔으면 대여섯 그루 사 가려고요. 작년 봄에 제가 이웃집 사는 아우랑 여기 다녀갔잖아요. 그때 나는 수국 묘목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이웃집 아우는 손바닥 크기 나무를 몇 그루 샀어요. 한데 두어 달 지나니까 그 나무들에서 연분홍하고 청색 꽃이 피어나잖아요. 얼마나 화사하고 탐스럽던지. 그 꽃을 볼 때마다 아쉽고 속상해서 아주 혼이 났다니까요." 맞은편에 앉은 여성의 낮은 웃음소리 위로 그이의 목소리가 다시 얹혔다. "생각해보면 형님이나 나나, 더는 아쉬운 일 만들지 않고 살아야 할 나이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은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제일 아쉬운 게 뭐예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내 청각은 한층 예민해졌다. 식어 가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을 때 나이 든 여성이 가느다란 한숨으로 말문을 열었다. "올해로 내 나이 여든여덟이야. 이만큼 멀쩡한 몸과 정신으로 아흔을 목전에 둔 나이까지 살게 될 줄 어찌 알았겠나…" 들어보니 그이는 갓 서른 살에 시작해 제법 크게 일군 예단 이불 전문점을 30년 넘게 운영해왔다. 환갑 지나면서 일하던 두 명의 직원에게 가게를 넘긴 건 자신에게 주어진 앞날이 10년 남짓이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복닥거리는 삶의 현장을 미련 없이 빠져나와 차근차근 정리하는 마음으로 노후를 살아보리라 결단한 거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과 달라서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또 오늘 같은 날이 30년 가까이 이어졌고, '맥없이 흐르는 시간'에 내던져져서 그이는 혼자 눈물을 훔친 적이 많다고 고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흔 전후에라도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걸 그랬다 싶은 마음도 들고. 사람들 속에서 땀 쏟고 눈물 빼며 치열하게 부대끼는 인생이 제일 가치 있고 행복하다 싶네."
대화를 마치고 커피숍을 나선 두 어른의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지난겨울 혹독하게 앓은 후 세상만사가 시들하게 보였다. 삶의 방향타를 놓은 듯 허랑하게 빈둥거리면서 2월 한 달을 다 보내고 3월을 맞았다. 그러면서도 무시로 습격하는 두통에 시달렸던 건 마음 한쪽의 불안까지는 다스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두 사람의 대화가 나를 달래고 타이르자며 팔 걷어붙이고 나선 어른의 목소리로 들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훼시장으로 갔다. 바질과 로즈메리 모종을 산 뒤 길게 늘어선 상가를 둘러보는데 한 블록 떨어진 가게에서 수국과 치자 묘목, 새순이 움튼 작약 알뿌리를 고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슬금슬금 그쪽 가게로 가서 나도 수국 묘목 두 개를 고르는 척하다가 그 어른과 눈을 맞췄다. 고요한 얼굴 위로 퍼지는 미소를 마주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할머니, 오늘 말씀 고마웠어요. 오래도록 명심하며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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