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위로받고 싶으세요? 잊혔던 라벨 스티커가 마음에 탁 붙었다

입력
2022.04.02 12:00

인터넷의 새로운 언어가 된 '밈'
밈으로 만드는 라벨 스티커도 인기몰이
라벨 스티커 주문 제작 성행

노트북에 라벨 스티커가 불어 있다. 박홍해진씨 제공

노트북에 라벨 스티커가 불어 있다. 박홍해진씨 제공

# 직장인 A씨의 노트북에는 이름 대신 익살스러운 이모티콘과 인터넷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문화 요소)이 담긴 라벨 스티커가 붙어 있다. 힘들 때마다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라벨 스티커는 그에게 부적 같은 존재다.

# 아이돌 팬 B씨는 얼마 전 오래된 라벨 프린터를 다시 꺼내 들었다. 팬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라벨 스티커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면서 라벨 프린터는 '덕질 필수템'으로 여겨진다. 라벨 스티커를 찍은 사진을 짤처럼 주고받기도 한다.


인터넷 밈을 실물로 소장하는 방법, 라벨 스티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라벨 프린터를 판매하거나 라벨 스티커 주문을 받고 있다. 번개장터 캡처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라벨 프린터를 판매하거나 라벨 스티커 주문을 받고 있다. 번개장터 캡처

몇 년 전 물건에 이름을 표시하기 위한 라벨 스티커가 유행하면서 거리 곳곳에는 스티커 기계가 들어섰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붙였던 라벨 스티커가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밈 문화와 결합하면서 현실 세계의 짤로 통용되고 있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는 라벨 스티커를 찍어낼 수 있는 라벨 프린터가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특정 제품에만 있는 이모티콘을 쓰기 위해 해당 제품을 애타게 찾는 글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자주 발견된다. 개인 제작자들이 라벨 스티커 도안을 서로 공유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들은 좋아하는 글귀를 스티커로 만들어 노트북, 휴대폰처럼 자주 쓰는 물건에 붙이고 다닌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폰꾸(휴대폰 꾸미기), 스꾸(스티커로 꾸미기) 등의 'ㅇ꾸' 문화가 유행하면서 소지품을 특색 있게 꾸미기 위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이어리와 일기장에 길게 글을 적는 대신 재치 있는 스티커 한 장을 붙이기도 한다.


취미로 시작한 라벨 스티커가 사업으로

박홍해진씨가 만든 라벨 스티커. 박홍해진씨 제공

박홍해진씨가 만든 라벨 스티커. 박홍해진씨 제공

전문적으로 라벨 스티커를 만들어 파는 비즈니스까지 등장했다. 라벨 스티커 주문 제작 업체 아이엠유어스티커스(iamyourstickers)를 운영 중인 박홍해진씨는 고된 회사 생활을 달래기 위한 취미였던 라벨 스티커를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광고 회사의 인턴을 지내면서 회사 생활이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힘들어 하는 그에게 회사 동료는 취미 생활을 가져보라 제안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라벨 스티커였다.

출장을 위해 떠난 도쿄에서 우연히 라벨 프린터를 만난 박홍씨는 다이어리의 메모를 스티커로 만들어 동료들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스티커가 점차 쌓이면서 라벨 스티커 기록을 위한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과 농담을 스티커 형태로 소장할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회사 업무에 지친 직장인부터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에게 판매를 요청했다. 호응이 커지면서 박홍씨는 2019년 아예 라벨 스티커 사업을 시작했다.


노래 가사도, 유행어도 나만의 스티커로 만들어 드립니다

아이엠유어스티커스에서 판매하는 라벨 스티커. 박홍해진씨 제공

아이엠유어스티커스에서 판매하는 라벨 스티커. 박홍해진씨 제공

언뜻 봐서는 라벨 스티커 만드는 게 몇 글자 새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박홍씨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준비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밈 공부다. 박홍씨는 "스티커를 만드는 사이에 이미 유행이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며 "또래 친구들이 스티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 손님과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했다.

잘 모르는 밈이 주문으로 들어올 때면 아이돌의 라이브 방송을 찾아보거나 SNS를 돌아다니며 팬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을 알아내기도 한다. 밈을 완벽히 이해할 때 그림, 장식, 글씨체, 배경 색이 어우러진 스티커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라벨 스티커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같은 밈도 개인의 고유한 색깔을 담아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대세를 따라가면서도 남들과 차별화하고 싶은 젊은 층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박홍씨는 "원하는 문구를 한 장씩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라벨 스티커의 매력 포인트"라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스티커 세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라벨 스티커 주문자들은 "내 트윗(트위터 게시글)으로 스티커를 만든다는 점이 뜻 깊다", "문구만 말해 줘도 어울리는 그림과 이모티콘을 넣어 주다니 최고" 등 만족도 높은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웃기지 않을 수 있지만…"

라벨 스티커를 만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라벨 스티커를 만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라벨 스티커라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업 초창기에는 라벨 스티커가 무엇인지, 어떤 문장과 그림을 선택할 수 있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박홍씨를 따라 라벨 스티커 판매를 시작한 사업자들도 여럿 생겼다. 각종 SNS부터 중고 거래 사이트까지 자신만의 색깔을 살린 판매자들이 수두룩하다.

박홍씨는 스티커를 제작할 때 기발한 밈을 보며 소리 내어 웃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고단한 회사 생활을 위로받았듯 주문자들도 스티커를 통해 잠시라도 에너지를 얻길 바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웃긴 문장이 아닐 수 있지만 손님에게는 최대한 재미있는 추억이 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김가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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